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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을 채운 클래식, 끝없는 울림의 세계 (2)

릴레이 수필 제2682번째

클래식이라면 장르나 연주자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게 들어왔다. 유명한 녹음들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생소한 작곡가와 연주가들에게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알려지지 않은 보석 같은 연주들을 수도 없이 만났다. 이른바 오직 ‘명반’에 집착하며 지적인 이기주의에 근거한 배타적 감상은 음악을 향유하는 진정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 나아가 유튜브에 나오는 무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클래식 몇 곡’ 따위의 하찮은 콘텐츠들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겠다.

 

음악에 대한 예민함 때문인지 클래식뿐만 아니라 종합예술이라는 영화를 볼 때에도 배경음악에 크게 반응했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유도 동기(Leitmotiv)라 하여 특정 등장인물을 상징하는 주제 선율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켰다. 영화음악 속에도 ‘테마’가 숨어 있다. 이를 통해 관객은 무의식중에 인물의 감정 변화나 상황의 긴장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내 경우 클래식이나 영화에 대한 감수성은 서로 자극 받으며 확장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과인지 영화 또한 지금도 매해 극장에서 300편 넘게 개봉작과 재개봉작 가리지 않고 관람하고 있다.

 

음악에 대한 호기심은 처음엔 베토벤으로 시작해 모차르트, 슈베르트, 차이콥스키 등으로 이어졌고 이후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 베베른 같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까지 탐험해 갔다. 그런데 근현대로 갈수록 오히려 음악적 취향은 더욱 과거로 향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바흐와 그 동시대 혹은 더 이전의 바로크와 르네상스 음악에 매료되어 있다.

 

 

가장 존경하는 작곡가는 단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1685-1750)로 그 숭고한 음악 세계는 곧 깊은 정신적 세계라 할 수 있다. 바흐 관련 서적, 악보, 음반들을 탐구하며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을 사유해왔다. 바흐는 대위법과 형식미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음악 안에서 신앙과 이성을 조화롭게 통합했고 음악을 통해 내면의 질서와 보편의 진리를 추구했다. 그 유산은 이후 세대의 작곡가들에게 전통에 대한 경외와 동시에 도전의 과제를 끊임없이 안겨주고 있다.

 

 

더불어 존경하는 작곡가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이다. 베토벤은 형식과 전통에 얽매인 예술관을 거부하고 창작의 자율성을 추구한 혁명적 예술가였다. 그의 음악은 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귀족 중심의 구체제(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의 권위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베토벤은 청력 상실이라는 비극 속에서도 위대한 작품들을 완성해냈다. 그의 삶은 체제에 대한 끊임없는 저항이었고, 그의 음악은 그 투쟁의 가장 강력하고 정교한 언어였다.

 

구스타프 말러(1860-1911) 역시 깊이 빠진 작곡가이다. 유대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평생 편견과 공격을 받았으나 내면의 불안과 상처를 음악으로 정직하게 응시하며 인간의 실존을 드러낸 작곡가가 말러이다. 그는 교향곡을 감정의 표현을 넘어 세계 전체를 담는 형식으로 확장했다. 개인적 상실과 고통을 감상적인 자기연민으로 소비하지 않고 인간 보편의 실존 문제로 전환한 말러의 태도와 기법은 낭만주의의 끝자락에서 현대 음악으로 이어지는 가교가 되었다.

 

요즘은 마우스 품만 들이면 누구나 고음질 음원을 접할 수 있다. 이제는 몇 번의 클릭만으로도 유튜브, Tidal, Idagio, Apple Music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에 담긴 상상 이상의 방대한 클래식 음원을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본인은 CD나 LP처럼 무수한 관리가 필요한 음반들 수만 장을 여전히 곁에 두고 있다. 혹자는 ‘고상한 척’하려 LP를 고집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LP의 가치는 단순한 소장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LP의 미덕은 무엇일까. 첫째, 엄청난 수의 LP 녹음은 아예 CD로 복각(remastering)조차 되지 않았다. 동구권 국영음반사 중 Eterna(동독), Supraphon(체코슬로바키아), Hungaroton(헝가리)과는 달리, CD 발매가 열악한 Muza(폴란드), Electrecord(루마니아), Jugoton(유고슬라비아), Balkanton(불가리아) 등의 LP들은 지금까지도 상당수가 복각되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만 해도 장 푸르니에, 헤르만 크레버스, 하이먼 브레스, 반다 비우코미르스카, 라인하르트 괴벨(특히 초기 녹음) 등 수많은 연주자들의 LP가 아직 제대로 CD로 재발매되지 않았다. 브로니슬라프 김펠이나 세르주 루카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듣기 위해서는 오직 LP만이 유일한 수단이다.

 

 

둘째, LP 특유의 따뜻하고 생생한 소리-특히 현악기의 까슬까슬하거나 촉촉한 음색-는 디지털 음원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감동을 준다. 이는 가장 최근 음반인 김봄소리 연주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2025, DG) 녹음조차 해당된다. 디지털 음원과 LP는 그 소리의 깊이 면에서 비교할 수준이 못된다. 그럼에도 LP는 대체적으로 1990년대 이전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발매된 CD나 디지털 음원 역시 당연히 들어야 한다. 더구나 SACD나 최근의 정성스러운 복각 CD는 LP에 버금가는 훌륭한 소리를 들려준다. 이러한 이유를 생각하면, LP에 대한 일방적 고집을 보이는 감상자들의 경우는 결국 오직 그 매체에 대한 집착이라 얘기할 수도 있겠다.

 

과거에 페이스북에 적던 다양한 기록들을 지금은 개인 블로그에 남기고 있다. 음악, 공연, 책, 영화, 인생 등에 대한 작은 글들이 많으니 비슷한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언제든 찾아주시면 좋겠다 (https://blog.naver.com/brunowal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