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선배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고 상가를 찾았다. 몇 달 전 우연히 영종도 호텔 로비에서 가족들과 휴가 중이라는 그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는 데 충격이었다. 그와 마주했던 일이 스쳐 갔다. 개원 첫 해 반장을 맡아 회람 수금액을 걷어 총무이사이던 그의 치과로 출근길에 들렀었다. 환자들이 그득했고 원장실 바로 옆 기공실에는 아직 스톤도 붓지 않은 모형 인상체가 널려 있었다. 다음부터는 은행 온라인 처리방식으로 바꾸자는 나의 돌발 제안에 그는 바쁜 와중에도 음료수를 권하고 팔자주름 좋은 웃음을 띠며 생각해 보자고 했다. 어머니 칠순 잔치 때는 어찌 알고 화한을 보내주었고, 등산모임 후에는 집 방향이 같다고 맥주를 사주기도 했다. 일요일인데 상가는 한적했다. 아직 미혼인 그의 두 딸과 아들이 맞았다. 혼사라도 치렀다면 덜 쓸쓸했을 터인데 처연했다. 수술 중 약 부작용으로 갑자기 가셨다고 설명하는 사모님 말씀에는 아직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절절함이 읽혔다. 고인의 대학 동기 이수백 원장님을 만나 더불어 추모했다. 고인과 비슷하게 묵직하고 신중한 분이다. 7개월이 넘었는데 그의 치과 간판은 그대로 걸려 있다. 금방 새 간판으로 바뀌면 야속하고 그대로 있으면
일본에 유학하여 한창 물이 오른 기사 조훈현이 병역문제로 귀국하자, 마지막 애제자를 잃은 83세의 스승 세고에 9단이 자살한다. 기성(棋聖) 우칭웬을 키워낸 노스승에게는 제2의 우칭웬을 기대한 제자를 잃고 상실감이 너무 컸을까. 기력이 쭉쭉 뻗어가는 십 대에 3년의 경력 단절은 ‘절대’ 만회할 수 없고, 성인 성(聖)자는 만인이 승복해야만 붙이는 것 아닌가? 그 후 조훈현은 근 20년간 한국바둑계에 전신(戰神)으로 군림하고, 십여 년간 세계를 제패한 신산(神算) 이창호를 길렀으며 현역 국회의원이다. 만약 조훈현이 병역특례를 인정받아 계속 정진했다면, 대한민국의 위상과 세계 바둑의 역사가 달라졌으리라. 몇 년 전까지도 공한증(恐韓症)에 떨던 중국 바둑이, 정부의 대대적인 후원으로 고속 성장하여, 한국의 천만 바둑 팬들은 박정환ㆍ최정의 고군분투에 조마조마ㆍ일희일비하고 있다. 남자들이 모이면 화제 1호가 군대 시절 얘기요, 2호가 축구이니, 군대에서 축구하던 얘기를 하면 날 새는 줄을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손흥민이 멋진 골을 넣으면 며칠 동안 온 동네 사람 얼굴에 화색이 돈다. 마주치는 얼굴마다 밝으니 작업 능률이 올라가고, 국민화합에 이르기까지 돈으로 따질 수
점심을 겸해 고교 동기가 방문했다. 필자의 출판기념회 초대장을 보냈더니 피치 못할 선약이 있다고 미리 축하한다고 왔다. 그는 동기회 활동이 액티브하고 반경이 넓다. 생업인 약국도 주민건강 최일선 보루란 자부심으로 밤 11시까지 한다. 자연히 출간 서적이 화제에 올랐다. 그가 “집사람이 독서를 좋아해서 불로그에 전문 서평을 쓰는데, ‘실사구시’가 안 된다.”며 말끝을 흐린다. 책만 파고드는 것은 벌이에 도움이 안 된다는 소리로 들렸다. 나도 평소 주변 후배들에게 교수ㆍ연구원 안 될거면 가방끈 길어야 소용없다 소리를 해왔기에 그 말에 공감했지만, 고상한 기품의 친구 부인이 떠올라 “그래서 외향적인 자네와 천생연분이 아니냐?”고 했더니 자기 연애할 때 에피소드를 한참 늘어놓았다. 실사구시(實事求是)는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다. 보통 추사 김정희를 떠올리지만 이미 한서(漢書)에 나온 말로 청대 고증학 학자들의 학문 방법론으로 되살아났다. 요약하면 정밀한 훈고를 구한다는 것이 첫째고, 둘째는 몸소 행해 실천해야 한다는 것(實踐躬行)이다. 이런 과학적 학문 태도는 생활과 유리된 형이상학적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떠나 ‘실학’ 학파를 낳게 했다. 그러나 일
가족밴드에 작은형이 회현면민의 날 행사에서 엄마가 상품을 타셔서 기분이 최고로 좋았는데 연달아 두 번째 행운이 찾아와서 엄청나게 행복해하신다는 얘길 전해 듣고 퇴근길에 기쁜 마음으로 안부 전화를 드렸다. 엄마는 별안간 며칠 전 꿈 얘길 해주셨다. 곳간에서 돼지들이 꿀꿀거리길래 가보니 똥을 잔뜩 싸놨더란다. 그런데 곳간에 똥을 잔뜩 싸질러 놓은 돼지들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 있는데 다른 돼지들을 아버지가 안아서 그곳에 또 넣는 걸 보고 왜 똥이 그득한 곳에 또 넣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시다가 꿈에서 깨셨다고 하셨다. 그렇게 엄마의 행운은 예지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의 첫 번째 행운은 10월 5일 회현면민의 날에 찾아왔다. 강당에서 체육대회가 열렸는데, 부락마다 주민들이 나와서 장기자랑도 하고 상품도 받았다. 다들 아시겠지만, 추첨할 때 우리의 가슴은 분비된 아드레날린 탓에 콩닥콩닥 두근거리고 볼은 발그레해진다. 그리고 한 번쯤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본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 저 1등 상품을 제게 주옵소서.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엄마는 김치냉장고도 주고 큰 TV도 주고 자전거는 또 얼마나 많이 주는지 모른다고 대회의 규모를 대략
올해도 어김없이 설날이 다가왔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새 옷으로 단장하여 새벽 일찍 할머니ㆍ할아버지를 찾아 세배를 드리고, 친지들과 어울림이 살아가는 행복으로 남아있다. 세월이 흘러 명절 분위기는 가족 단위로 해외 여행을 많이 하는 추세로 흐르는 듯하다. 시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시댁도 명절이 사라지는 듯 안타까워진다. 친정 식구들은 모두 성장한 동생들이 제각기 가정을 꾸려가기에 바쁘다. 골고루 살림이 넉넉하면 좋으련만 부모님께는 손톱의 가시마냥, 여러 가지 일로 생활이 힘든 자녀 생각에 아흔을 바라보면서도 밤낮으로 걱정을 하신다. 올해는 큰마음을 먹고 며느리의 설날 음식 장만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모님을 설득하여 남동생 가족과 함께 설악산에서 설날을 보내기로 하였다. 이젠 부모님도 조상을 위한 차례보다는 자식들과 함께하는 여행을 더 즐거워하시는 듯했다. 잠깐 다녀올 여행인데도 어머님은 한달살이 마냥 많은 준비를 해 오셨다. 매일 아프시다는 얘기가 끊임이 없었는데 여행 중에는 신이 나신 듯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불편하지 않으시냐고 여쭤보아도 괜찮다 하셨다. 이렇게 좋아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생활이 바쁘다고 조금의 짬도 내지 못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그득했다
저리도 하늘은 푸르고 이리도 햇빛은 눈부신데 봄 같지 않은 봄, 여름 같지 않은 여름 지나고 짙어지는 단풍, 서늘한 바람 보고 싶은 얼굴들 한잎 두잎 낙엽 되어 떨어지며 겨울이 오는 소리 하얗게 들리네 처음 겪는 사회적 거리두기 마음의 거리마저 멀게 하고 집안에 콕 박혀 혼자 먹는 식탁엔 외로움만 쌓이네 문밖에 나서려면 으레 신발을 챙겨 신듯 마스크 쓰고 코와 입을 막고 표정마저 감추며 서로서로 경계의 눈초리 사랑이 부재하는 ‘코로나의 거리’ 조심조심 마스크만 걸어가네 친구들과 수다 떨며 마시던 술 한 잔 간절하고 정든 사람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마시던 커피 한잔 그립네 그저 그런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이 그렇게 소중한 행복이었는지 모르고 살았네 수천만의 코로나19 확진 환자, 수백만의 코로나19 사망자, 총 한번 쏘지 못한 전쟁 세계적 팬데믹(pandemic) 상황에 빠지면서 일상의 모든 것이 변했네. 인간의 오만을 벌하려는 자연의 복수인가. 신이 죄 많은 인간에게 내리는 징벌인가. 인간이 자초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습관적인 과잉만남을 교정 하는 격리일까. 이제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세상으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코
초겨울 날씨답지 않게 따뜻한 휴일, 한낮의 햇빛은 야외활동을 하기에 너무도 행복함을 느끼게 하였다. 70세를 바라보지만 아직도 주부 초년생인 내가 김장을 하려고 하니, 초등학교 동창생 친구가 같이 도와 주겠다했다. 이웃 섬기기에 몸을 아끼지 않는 친구는 남을 위한 봉사가 몸에 저절로 배인 듯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어려운 이웃에게 된장, 고추장, 김장을 상상 못 할 정도로 많이 만들어 나눠 준다 하니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전원생활로 오래전부터 텃밭 농사를 지어왔지만, 올해도 배추는 김장을 하기엔 크기가 작아서 절인 배추를 주문하였다. 무는 우리 집 텃밭에서 제법 크게 자라 그것을 사용하기로 하여 아침부터 김장 준비를 하였다. 제일 먼저 김칫속에 넣을 무채를 썰었다. 몸에 익혀지지 않던 일이라 무 썰기도 힘이 들었다. 한낮이 되니 친구가 왔다. 물론 우리 집 김장 준비보다 더 많이 김치 속을 준비하여왔다. 이삼백 포기씩 김장을 하던 친구의 손놀림에 20 포기 김장은 소꿉장난처럼 순식간에 끝이 났다. 김장의 끝은 둘러앉아 먹는 식사 시간이듯 찹쌀밥에 굴을 섞은 김치 속과 절인 배추, 대구탕, 돼지고기 바비큐로 환상의 식사 시간이 되었다. 초등학교 동창생답게
지진이야 늘 일어나지 땅은 늘 살아있으니까 숨 쉬고 꿈틀거리는 거대한 생명 터지려는 분노 안으로 안으로 구심(求心)으로 끌어 누르고 용암(鎔巖)의 꿈틀거림 때로는 침묵으로 응시하라 오랜 세월 쌓이고 쌓인 시뻘건 응어리 가슴 가슴으로 품어 순수한 대지의 헐떡이는 숨소리 분노의 하늘로 치솟는 꿈꾸어라 아직은 흔들거리고만 있을 때야 아직은 꿈틀거리고만 있을 때야 어느 날 푸른 하늘이 활짝 열리고 어느 날 붉은 태양이 찬란히 빛날 때 빛과 빛이 만나 어둠을 이기고 불과 불이 만나 세상을 태우고 새로운 천지가 열릴 때까지 한 세상 마음껏 흔들려 보자 지진이야 늘 일어나지 땅은 늘 깨어있으니까 숨 쉬고 꿈틀거리는 거룩한 지진. 김계종 전 치협 부의장 -월간 《문학바탕》 시 등단 -계간 《에세이포레》 수필 등단 -군포문인협회 회원 -치의학박사 -서울지부 대의원총회 의장 -치협 대의원총회 부의장 -대한구강보건학회 회장, 연세치대 외래교수 -저서 시집 《혼자먹는 식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