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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와 인간의 친절함

시론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현재, 영국 옥스퍼드대 진화생물학자)의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는 1976년에 처음 출간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큰 파급력을 끼쳤습니다. 이 책은 진화론을 “유전자 중심 관점(gene-centered view of evolution)”에서 바라보며, 기존의 다윈주의를 새롭게 해석한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특히 밈(meme)이라는 문화적 전파 단위를 소개한 것도 이 책의 중요한 기여입니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그 내용도 도발적입니다. 유전자는 단순히 생물학적·화학적 정보를 담은 분자 단위에 불과하지만, 도킨스는 여기에 인간적인 가치판단이 담긴 “이기적(selfish)”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습니다. 인간의 몸은 결국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 위해 활용하는 “생존 기계(survival machine)”일 뿐이며, 인간의 행동 또한 궁극적으로는 유전자의 보존 전략이라는 것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이 책을 접한 저는, 인간이 바이러스나 세균, 혹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고차원적인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고 생각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 자신 역시 단순히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 살아가는 하나의 매개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표현은 생명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드러냅니다. 개체는 살아남고 번식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유전자는 후세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진화의 긴 흐름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결국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유전자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다윈 이후 진화론의 현대적 해석을 주도한 해밀턴의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 이론이나, 트리버스의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 개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해밀턴은 자신의 유전자가 일부라도 공유된 친족을 돕는 행동이 결국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하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고, 트리버스는 당장의 손해처럼 보이는 이타적 행동이라도 상호적 관계 속에서 언젠가 보답을 받게 된다면 유전자 생존에 유리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보여주는 친절함(kindness)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심리학과 철학에서 친절은 보통 “타인을 배려하거나 돕는 행위로서, 즉각적인 보상이 없어도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동”으로 정의됩니다. 도킨스는 무리 속에서 협력하고 타인을 돕는 행위조차도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더 효과적으로 보존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설명합니다. 친절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생존 전략이라는 것이죠 (그림 1).


흥미로운 점은, 친절의 기준이 문화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한국이나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예의와 배려가 친절의 중요한 기준이지만, 서구권에서는 직접적인 도움이나 언어적 표현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문화에서는 사소한 관심 표현이 친절로 여겨지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개인적 공간을 침범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죠. 따라서 친절은 보편적인 동시에 상대적인 개념이며, 그 본질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이어가기 위한 행위”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본능적으로 발현되는 순간적인 친절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누군가 무거운 짐을 들고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할 때 잠시 문을 잡아주는 행동은 의도적인 계산 없이 나오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회적 신뢰를 쌓고 관계를 돈독하게 합니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순간적 친절을 “적응적 행동(adaptive behavior)”의 한 형태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유전자에 각인된 행동 패턴이든, 혹은 가정교육과 사회적 학습을 통해 길러진 습관이든 간에, 친절이 관계를 유지하고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의료계, 특히 치과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친절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체감할 것입니다. 현재 한국의 치과 진료 환경은 무한 경쟁과 저수가, 그리고 소송 위험 증가라는 압박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환자와의 신뢰, 의료진의 따뜻한 태도, 그리고 진료 과정에서 드러나는 친절은 단순한 가격 경쟁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핵심 자산입니다. 실제 연구에서도 환자의 만족도와 재방문 의도는 치료 결과뿐 아니라 의료진이 보여주는 공감과 친절에 크게 좌우된다고 보고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환자에게 다정하고 배려 깊은 태도로 다가가는 일은 단순한 진화적 전략을 넘어, 진정한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유전자는 진화의 관점에서 이기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단순히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 아니라, 그 위에 문화와 가치, 윤리와 감정을 쌓아 올린 복합적 구조입니다. 친절은 본능에서 비롯되었든, 교육과 학습을 통해 길러졌든 간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덕목이며, 다정함으로 승화될 때 사회를 지탱하는 윤활유가 됩니다. 친절함의 기원이 유전자의 전략일 수는 있으나, 오늘날 그것은 여전히 인간 사회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존엄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