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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를 타던 손으로, 이제는 환자의 ‘삶’을 조율합니다

- 국악, 경영, 그리고 치의학…이질적인 세계가 빚어내는 치유의 합주곡
릴레이 수필 제2691번째

내 열 손가락 끝에는 아주 오래된 기억이 박혀 있다. 열아홉 살 무렵, 서울대 국악과 입시를 준비하며 거문고의 굵은 명주실을 술대로 수만 번 내리치던 시절, 내 손끝은 물집과 굳은살로 딱딱하게 여물어 있었다. 대학에 진학해 연주를 넘어 우리 소리가 가진 논리적 구조와 미학적 원리를 파고들었지만, 나는 그 안의 질서를 더 넓은 세상에 대입해보고 싶다는 갈증을 느꼈다.


그 갈증이 나를 경영학이라는 전혀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경영학과로 전과하여 악보 대신 재무제표를 읽고, 감성 대신 효율을 계산하며 조직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돌아가는 이치를 배웠다. 그리고 지금, 나는 또다시 새로운 굳은살을 손끝에 새기고 있다. 묵직한 거문고 술대나 펜 대신, 분당 수십만 번 회전하는 핸드피스의 진동을 느끼며 환자의 구강이라는 소우주를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내 독특한 이력을 보며 묻는다. “국악을 하다가 경영을 배우고, 다시 힘든 치과의사의 길을 걷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것 아닙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한다.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무너진 질서를 바로잡아 최적의 균형을 찾아내는 ‘조율’의 과정이니까요.”


1. 치의학, 인체라는 정교한 악기를 조율하는 미학
국악이 소리의 질서와 체계를 연구하여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치의학은 우리 몸의 무너진 질서를 회복시켜 삶을 지탱하는 학문이다. 미세하게 어긋난 교합 때문에 삐걱거리는 턱관절, 충치로 인해 불협화음을 내는 신경조직을 마주할 때면, 나는 마치 틀어진 거문고의 괘를 조정하듯 신중해진다.


치과의사는 단순히 상한 곳을 때우는 기술자가 아니다. 우리 몸이라는 복잡하고 정교한 악기가 다시금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주를 이어갈 수 있도록, 마이크론(µm) 단위의 오차를 잡아내는 섬세한 조율사다. 거문고를 타며 익힌 손끝의 예민한 감각은 환자의 미세한 불편함을 감지하는 촉수가 되고, 국악 이론을 통해 배운 구조적 사고는 복합적인 증상의 원인을 찾아내는 통찰력이 되었다.


2. 경영학의 시선으로 바라본 진료실
서울대 경영학과에서 내가 배운 것은 단순한 이윤 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정된 자원으로 최적의 효용을 도출하는 의사결정의 예술’이었다. 나는 이 철학을 치과 진료실에 그대로 적용한다. 진료실은 하나의 작은 경영 현장이다. 환자가 감내해야 할 시간과 비용, 의사의 에너지, 그리고 최적의 재료와 술식이 만나는 접점에서 비로소 완벽한 치료 결과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감성에만 치우친 의사도, 냉철한 이익만 좇는 의사도 되고 싶지 않다. 국악의 깊이 있는 인문학적 소양으로 환자의 아픔에 공명(Resonance)하고, 경영학의 합리적인 판단력으로 가장 효율적인 치료 계획을 수립하는 의사. 이 두 가지 날개를 달고 환자에게 ‘따뜻하면서도 명쾌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3. 융합이 만들어낼 새로운 합주
국악, 경영, 그리고 치의학. 누군가는 이 궤적을 보며 돌아왔다고 말하지만, 나는 내 세계가 확장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앞으로 진료실이라는 공간에만 갇힌 의사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아픈 곳을 진단하고 합리적으로 경영하는 ‘세상의 주치의’를 꿈꾼다. 전통을 이해하는 깊이, 시스템을 꿰뚫는 눈, 그리고 생의 감각을 되살리는 손기술. 이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낼 나의 인생 합주곡은 이제 막 첫 악장을 시작했다.


오늘도 나는 묵직한 거문고의 저음처럼, 환자의 삶에 깊은 울림을 주는 의사가 되기 위해 핸드피스를 잡는다. 내 손끝은 이제 단순한 치료를 넘어, 누군가의 일상을, 그리고 삶을 조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