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언어학
무의식이 언어적 규칙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언어적 규칙성은 기표와 기의의 일대일 대응이 무너진 상황에서의 규칙성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규칙성은 무엇일가?
한 가지 조심할 것은 기표가 떠다닌다고 말했다 해서 기표와 기의 사이의 어떤 일정한 관계도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경우 정신분석학을 ‘과학’으로 정립하려 한 라캉의 시도는 좌절될 것이다. 라캉은 구조주의자인 한에서 합리주의자이며, 따라서 구조를 좀더 역동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이지 합리적 파악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 ‘구조’라는 말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구조’라는 말을 쓰는 한 문자 그대로 어떤 구조를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라캉에게서 기표와 기의는 일정 지점에서 만난다. 그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라캉 사유에서 합리주의적 측면이다. 그러나 기표는 궁극적 기의에 끝내 닻을 내리지 못한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기의의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이 라캉이 합리주의에서의 한계를 긋는 부분이다.
라캉은 이 언어학적 구조들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은유와 환유라고 생각한다. 은유는 압축이다. “불타다”와 “사랑하다”는 “뜨겁다”라는 공통 요소를 함께-중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압축(condensation)이다. 또한 은유는 치환을 특징으로 한다. “부자가 되다”가 ‘돼지’로 치환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바로 이런 은유의 언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은유는 동시성을 기반으로 한다. “불타다”와 “사랑하다” 그리고 “부자가 되다”와 ‘돼지’ 사이에는 어떤 시간적 선후도 없기 때문이다.
환유는 다르다. 환유는 이행이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환유이다. “잔을 들다”와 “술을 마시다” 사이에는 이행/이동의 관계가 성립한다. 환유에서 두 항은 치환되기보다는 조합된다. 그리고 환유에는 시간적 요인이 개입한다.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시다”의 앞에 오며, 또 그래야만 환유로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참고: 제유는 부분으로서 전체를 나타내는 경우이다. 사각모는 대학을 나타낸다)
정신분석학자는 기표들(예컨대 환자의 말)을 분석함으로써(즉 그 언어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그런 말들이 뜻하는 환자의 ‘인생’)을 밝혀내고자 한다. 그런데 기표들과 기의들의 관계가 매끈한 일대일 대응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난점들이 발생한다. 라캉은 모든 열쇄는 결국 기표들이 쥐고 있으며, 우리는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만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의는 기표에 잡히지 않고 계속 미끄러진다. 물론 분석가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기의를 찾아낼 수밖에 없다. 분석가는 기표들이라는 낚시바늘을 던져 기의들을 낚아낸다. 기표들과 기의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것이 성공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칸트의 물자체처럼, 메이에르송의 ‘초합리적인 것’처럼 저편에 머무른다. 이곳을 라캉은 ‘실재계’라고 한다. 그것은 언어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 세계 자체, 인생 자체일 것이다. 라캉의 사유는 상상계에서 출발해 상징계로 가지만 결국 실재계에서 끝난다. 아마 인생의 ‘의미’는 영원히 기호로 포착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 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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