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치과의학교는 학교를 신축하고 재단법인인가 받은 후 전문학교를 신청했다. 1929년 1월 25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京城齒科醫學專門學校)는 4년제로 인가를 받아 그 해 4월 15일 개교했다. 경성치과의학교를 개교한지 꼭 7년 만에 전문학교로 승격한 것이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교육의 목적은 전문적인 치과의학 교육과 황국신민을 연성함에 있었다. 학칙 제1조에 본교는 치의학에 관한 고등의 학술과 기예를 교수하고, 특히 황국의 도에 따라 국체관념의 함양과 인격도야에 유의하며, 국가필수의 인재가 될 수 있는 황국신민을 연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돼 있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의 수업 연한은 4년이었고, 생도 정수는 480명이었다. 전문학교로 승격한 후 생도수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수의 일본인 학생들이 입학했다. 따라서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의 비율은 역전돼 일본인 학생이 많은 학교로 바뀌었다.
전문학교로 승격할 때의 교수진은 임상에서 보존학, 보철학, 구강외과학, 교정학, 치료학 그리고 기초에서 치과기공학, 병리약리학, 병리조직학으로 체제를 모두 갖추게 됐다. 이후 교수진은 보강돼 1930년경 76명이나 됐다. 교장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병원장 호리 타께시(堀武), 외과부 카키미 요죠(垣見庸三), 보철부 히로타 세이이찌(弘田精一), 보존부 호리 타께시(堀武), 교정부 모리 데쓰로(森哲郞), 특진실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 기초의학부에 병리조직학 니시야마 유기오(西山幸男), 병리약리학 야오 타로(失尾太郞), 일반해부학 쿠와야마 쿠니마츠(桑山邦松), 기공학교실 오카다 타다시(岡田正) 등이었다.
나기라 다쓰미는 치과재료학의 강의는 치과재료의 각 종류에 걸쳐 연구·제조하는 전문가가 강의하는 편이 이상적이라 생각했다. 1931-1932년경 마츠카제 켄지(松風憲二)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명했고, 그는 매년 2월 1주간 머물면서 1년분의 강의를 1944년까지 강의했다. 이러한 일로 일본의 각 대학에서도 마츠카제 켄지(松風憲二)와 미야츠 하지메(宮津一)에게 재료학의 강의를 의뢰하기도 했다.
1931년 타까시마 요시우도(高島義人)와 오카다 시로(岡田四郞)는 일찍 사직했다. 전쟁의 소용돌이는 경험 있는 교수들을 교직에서 떠나게 했다. 오카다 타다시(岡田正)·야오 타로(失尾太郞)·니시야마 유기오(西山幸男)·모리 데쓰로(森哲郞)·쿠와야마 쿠니마츠(桑山邦松)·호리 타께시(堀武)는 전쟁이 끝나기 2∼3년 전부터 떠나갔다.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제2세대인 졸업생인 요코다 세이죠(橫田成三)·이나가와 에이치(稻川英一)·마키야마 마사후미(牧山正文)·하라다 카즈유키(原田一幸) 등이 교수로 발탁됐다.
1931년 3월 13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일본 문부성 지정학교로 인가됐다. 이것은 치과의사법 제1조 제1호에 의거해 제64호로 고지됐다. 이렇게 된 것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교육기관으로서 손색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1929년 2월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는 다시 문부성 지정으로 허가를 받으려고 교섭할 때 학교를 시찰하러 나온 시학위원 시마미네(島峰)과 문무성의 하라다 칸(原田屈官)은 재단법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기본금이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때 나기라 다쓰미는 이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재단의 기금은 없으나 조선총독부가 보조금을 내고 있으므로 정부가 이 학교를 보증하고 있는 것이라 강변해 문제가 해소됐다.
1934년 7월 10일 학칙을 개정해 남녀 공학제가 폐지됐다.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은 것은 일본 문부성의 지정학교로 인정받기 위한 요건이었다. 아무리 좋은 남녀 공학제도라 하더라도 일본 전문학교는 남녀공학이 없었기 때문에 식민지에 처한 우리로서는 일본의 기준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1931년 문부성 지정 때 문부성의 견해로는 중학교와 여학교는 학력 차이가 있어 학력 수준이 저하된다는 것이었다. 1945년 전후 처음으로 이러한 공학을 이해한 일본인의 입장에서 기이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교과과정은 일본의 치과의학전문학교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