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치과의학회는 1932년 10월 30일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배경으로 설립됐다. 이 학회에서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교우회원 및 회의 목적에 찬성한 일반치과의사를 정회원으로 하고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학우회원을 준회원으로 조직됐다. 경성치과의학회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배경으로 설립됐다는 것은 전날인 10월 29일에 학교 창립자 토미타 기사구(富田儀作)의 동상 제막식에 치의학계의 많은 인사가 참가한 다음 날에 설립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설립의 목적은 치의학의 연찬 및 그 향상 발달을 도모함에 있었다.
경성치과의학회는 설립 시 회원이 약 400여명 정도이었다. 회장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장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가 맡았고, 기타 임원은 회장이 선임했다. 회의 임원은 회장 1명, 부회장 1명, 평의원 약간 명, 간사 약간 명이 있었다. 회장은 회무를 총리하고, 부회장은 회장을 보좌하며, 회장이 부득이한 사유가 있을 시는 이를 대리하도록 했다. 평의원은 평의원회를 조직하고 회장의 자문에 응해 중요한 회무를 심의하며 간사는 서무, 회계, 집회, 편집 등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했다.
한국인은 1932년 평의원 안종서, 박명진, 수원 이창용, 평양 한종호 등이 참석했다. 학회에서 발표한 사람은 16명이며 481개중의 연제 중 약 11%가 되는 52개를 발표했다. 이 연제 가운데는 박명진(朴明鎭)의 박사학위 관련 논문 및 정보라(鄭保羅)의 ‘스틸, 펜싱응용에 의한 계속치 조제법 및 치열 부정에 의한 열등감의 교정 1례에 대해’라는 증례 보고가 관심 사항이 되기도 한다.
경성치과의학회는 조선치과의학회와 잦은 마찰이 있었다. 경성치과의학회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교우회 사업에서 떠나므로 일반치과의사들도 회원으로 확장하게 됐기 때문이다. 나기라 다쓰미(柳樂達見)는 “학회의 임무는 학문을 진보 발달시켜야 함으로 누구든지 입회시킬 수 있고, 또한 회원은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반대의 입장은 경성치과의학회가 자기 학교 위주로 활동한다면 공명정대하지 못할 수 있으므로 기존의 조선치과의학회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것이었다.
경성치과의학회는 조선치과의학회와 경쟁적으로 활동했기에 규모 면에서 양적인 팽창을 가져왔으며 해마다 졸업생 배출로 회원이 증가돼 학회의 역량이 증강됐다. 경성치과의학회의 총회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지된 이외에 설립부터 1943년까지 11번 열렸다.
<제1361호에 계속>
출처: 한국근대치의학사(출판: 참윤퍼블리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