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음의 별장지기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보물이 하나쯤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존재감만으로 미소 짓게 할 것이며, 소중한 가치가 따뜻한 사람이라 더욱 더 행복해짐은 나도 어느새 중년이 되어가는 까닭일 것이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미산리.
답답한 도시를 빠져나와 새로 생긴 경춘 고속도로를 지나고, 산과 계곡으로 드리워진 시골길 위를 한참 달리면 나타나는 내린천을 품고 있는 자연의 정확한 지명이다.
여러해 전 여름, 여행과 탐험을 좋아하는 아내와 딸들의 호기심에 이끌려 찾게 된 이곳엔 1990년대 말 뉴질랜드에서 시작되어 한국 아니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모험이 허락된 리버버깅(River Bugging)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름조차 생소하던 이 신종 레포츠가 도입되던 시기에 초등학생으로 대한민국 1. 2호 여학생이던 딸들이 중고생이 되었으니, 벌써 5년쯤 전으로 기억된다. 리버버깅(River Bugging)은 비슷한 급류타기지만, 단체로 하는 래프팅이나 노를 젓는 카누와는 달리 리버버그(River Bug)라는 튜브에 장비를 갖추고 스스로의 힘으로 도전과 모험을 즐기는 개인적인 레포츠다. 비교적 간단한 적응 훈련을 마치고 힘차게 파이팅을 하고 나면, 힘껏 헤쳐 나가야하는 물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격려하며 같은 물 위를 흘러가다가도, 협곡에서 급류를 만나 튜브가 전복되면 안전벨트를 해체하고 바위틈으로 떠밀려 가기도 하면서 유속이 낮은 안전지대로 몸을 피하고, 다시 정비하여 일행에 합류해야 여정을 마칠 수 있다. 평화로운 물 위를 떠내려가는 여정이 동행이고, 물속에서의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이야말로 자신만이 헤쳐 나가야 하는 고행이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어쨌든 수면위의 평화와 수면 아래의 역경은 잔잔한 호수에 한가롭게 떠있는 우아한 백조의 양면이라고나 할까.
세월이 흘러 반복된 학습 효과에 힘입어 딸들은 언젠가부터 리버버깅(River Bugging) 초보자들을 인도하는 시범조가 되어 초.중.상급의 전 코스에서 모험과 스릴을 만끽하고 있다.
이듬해부터 아내는 물 밖에서 응원하는 주변인이 되었고, 그 이듬해부터 나 또한 아내를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먼발치서 바라보는 관람객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하라면 다시 도전할 수 있을지 신중히 고려해야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의 겁쟁이가 되었다.
극기 훈련을 뒤로 한 아내와 난 한국 100대 명산 중의 하나라는 방태산을 오르기도 한다. 2시간 남짓 등산을 하면 3대 광천수 중의 하나인 개인약수의 짜릿함은 갈증을 날려 보낸다.
이 밖에도 성수기면 치러지는 맨손 고기잡이 체험은 민물 송어의 희생으로 참가자들의 손과 입을 호사시켜준다.
이 모든 행사를 진두지휘하는 외모가 범상치 않은 우리의 이장님, 이곳의 주인장인 털보 이장님이 계신다. 이곳에 오던 첫해부터 지금까지 우리 식구의 모든 일정을 챙겨 주시고 넉넉한 인정으로 우리를 대해주신다.
강원도 깊은 산골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이장님의 별장은 흙과 나무로 만들어진 자연 그 자체로 때론 곤충들까지 함께하는 모든 생물의 안식처다. 해마다 여름이면 반드시 방문해야하는 필수 코스가 되어버린 별장에서의 이장님은 너무 익숙해 드러내놓고 뻔뻔해지게 만드는 친척이나 다름없는 맘씨 좋은 옆집아저씨가 되어주신다.
10여 년 전 도시 생활을 접고, 이곳에 귀농하여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고 낯선 사람들에게 다가가 하나가 되었고, 마을의 많은 일들을 돌보시는 이장님까지 되셨으니 완전히 토박이가 되신 것이다. 연배도 우리 부부와 비슷하신 이분은 본인이 길 닦아놓고, 집터도 마련해 놓았으니 언제든 도시 생활이 재미없어지면 이곳으로 오라 하신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쉽게 박차고 나올 용기도 없고, 아직은 명분도 마땅치 않아 실현 가능성이 없지만, 마음속의 안식처가 하나 있다는 것은 삶의 큰 위안이 아닐 수 없다. 점점 더 새로운 사람과 친해지기 어려워지는 나이이고 보면 새삼 이장님의 관심과 배려가 마음 깊이 와 닿는다. 과연 나는 누군가에게 앞서 경험한 새로운 세계에서 얻은 소중한 결실을 기꺼이 공유하고, 심지어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는가를 반성해본다. 또한 훌훌 털고 떠날 용기가 있는가도 자문해본다.
‘누군가가 내게로 와 어떤 것을 원한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는 삶이고 싶다’고 제대하던 날 현황판에 남겨 놓았던 마지막 메시지처럼 살려고 노력하고 싶다.
이제 친척 같은 아니 가족 같은 그분, 우리 마음의 별장지기 이장님께 그리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여름을 맞아야겠다. 이장님 며칠 후에 뵙죠!
남영준
(주)진덴탈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