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중의 문화산책
임철중 전 치협 대의원총회 의장으로부터 책, 영화, 꽃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삶에 대한 박학다식하면서도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레미저라블
고교후배 중에 일간지 편집국장 역임 자가 많다. 자랑스러운 프로 중의 프로, 엘리트 글쟁이들이다. 지방지 주필로 퇴임한 A와 중앙지 국장을 지낸 B는 친한 동기생인데, 얼마 전 뮤지컬을 영화로 만든‘레미저라블’을 두고 티격태격이 있었다고 한다. A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격찬을 하자 B가“나는 별로더라”고 초를 쳤다면서, A는 다소 거북했던 심정을 필자에게 토로한다. 가벼운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갔으나, 골든 글로브의 3관왕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아카데미 시상식 보도를 보며, 두 사람의 의견 차이를 새삼 분석해 본다.
첫째는 에고(ego)의 충돌이다. 신문사 데스크는 기고만장한(?) 밀림의 왕자다.
누가 주제(主題)의 헤게모니를 쥐고 떠드는 꼴을 못 본다. A는 한번 필이 꽂히면 쉽게 흐느끼는데, 십대 문학소년 같이 천진한 감격은 그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날도 A가 그렇게‘오버’를 하자, B의 청개구리가 발동하여 자신도 오버로 받아친 것이다. 오버끼리 충돌이요 본의를 벗어난 어깃장 놓기다. 둘째, B가 진심으로 이 영화를 우습게(?) 봤을 수 있다. 필자는 중학시절 단체입장으로, 장 가방 주연의 레미제라블을(1957) 본 감격을 일 년 후배인 두 사람과 공유하기에, 그 심정을 짐작한다. 그것은 장엄한 서사시였다. 뮤지컬의 본 이름은 Musical Comedy다.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영화가, 영화보다는 뮤지컬이, 뮤지컬보다는 뮤지컬 영화가 더 가벼워서, 각각 체급이 다르다. 또한 감수성이 예민한 사춘기에 두뇌를 선점(先占)한 장 가방의 위상을 휴 잭맨은 도저히 따르지 못한다. 마리우스를 등에 업고 어두운 지하 수도를 빠져나오던 초인적인 괴력. B는 뮤지컬 영화를 보면서 그동안 간직했던 장발장의 영웅 이미지가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제 객관적으로 리뷰 해보자. 첫째 뮤지컬은 불과 20여개 남짓한 노래(Score)로 구성된다. 더구나 레미저라블은 모든 대사를 노래하는 그랜드오페라를 흉내 내어 스토리텔링의 여유가 더 줄었다. 관객들이 장장 2500여 쪽의 텍스트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하이라이트만 노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미 발표된 작품의(프레데릭 마치‘1935, 장 가방, 리차드 조단도‘1978, 벨몽도‘1995, 니슨 ‘1998, Animation 및 Live Musical 등) 영향을 피할 수 없어, 공연작품으로써 완성도를 단순비교하면 매우 불리하다. 둘째, 무대에서 느끼는 현장 특유의 흥분과 박력을 보상하려고 최대한의 클로즈업과 스펙터클한 장면(배를 끌어 올리는 첫 신, 1832년 봉기 등)을 동원, 상당부분 성공하였다. 그러나 클로즈업에 적합한 마스크를 우선한 탓인지 자베르의 가창력이 귀에 거슬리고(뮤지컬의 생명인 정확한 발음과 성량 미흡, 통상 악역은 베이스처럼 굵고 낮은 톤이 바람직), 바리케이드 장면은 장 가방의 영화보다도 어딘가 왜소해 보인다. 셋째, 전 대사를 노래로 소화하려니까 단조로운 멜로디와 반복적인 리듬으로, 마치 서창(敍唱: Recitativo)처럼 밋밋한 느낌이 있으며,‘Look Down!’ 외에는 뛰어난 스코어도 별로 없다. 넷째, 원작의 거대담론을 얼마나 살렸느냐는 점이다. 전인(全人)적 천재 빅토르 위고의 레미저라블은 세계문학사의 정상에 오른 고전이다. 집필 동기는 딸의 자살이라 하며, 기나긴 망명생활 중에 쓴 대작이다. 서문에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있는 한 이런 책이 무익하지 않으리라”고 썼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선구자적 휴머니스트였다. 19세기 중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영성(靈性)의 전율을 느낀다. 뮤지컬은 물론 극영화로 표현하기에도 무거워 버거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긍정적인 면을 보자. 첫째 세계를 휩쓰는 경제난 속에서 “분노하라, 점령하자!”의 외침에 부응하는 분노와 연민의 격한 반향을 일으켜, 골든 글로브 뮤지컬부문을 휩쓸었다. 둘째, 젊은 세대는 깊은 원전(原典)의 우물에서 힘겹게 길어 올리는 한 컵의 맑은 물보다, 가벼운 리듬 속에서 필이 꽂히는 직설화법을 선호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성공은, 담론(談論)을 담아내는 그릇(Vehicle)이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사극(史劇)적 고증을 무시하고 가브로슈 소년의 치열교정장치를 클로즈업 시킨 감독의 뻔뻔함(?)이 이를 웅변한다. A도 B도 모두 다 옳다.
뮤지컬은 뮤지컬일 뿐 심각하지 말자. 그저 함께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