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가 밥 먹여주는 사회
TV광고를 보다 깜짝 놀랐다. 외모가 ‘대중매체 기준으로 그저 그런’ 남매가 활짝 웃으며 천상의 목소리로 CM송을 부르고 있었다. 그렇다. 가수가 되려는 사람은 노래를 잘 하면 되고 그러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과 자원을 투자하는게 정상적인 사회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세대는 어릴때부터 무엇보다 먼저 외모를 준비해야 한다는 신념에 빠져 있다. 우리 사회의 최고의 가치, 성공의 열쇠는 단연 외모인 듯하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다들 예쁜 꽃을 좋아하지 않냐고? 사람은 꽃이 아니다. 그리고 꽃들끼리는 예쁘고 밉고의 서열을 정하지 않는다. 무엇이 나쁜지 보자. 자아나 가치관이 형태도 갖추기 전부터 아이들이 무방비로 외모지상주의에 노출된다. 어릴때부터 외모로 힘들어하고 서로를 평가하여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외모만 좋으면 만사형통이고 그렇지 않으면 놀림감이 된다는 공식을 TV와 인터넷은 지성스레 보여준다. 연예인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경전 문구보다 강한 진리의 말씀이 되어 실행의지를 부추긴다. 또래집단 속에서 신나게 놀고 생각하며 온전한 자아가 만들어져야 하는 시기에 감당하기 힘든 그림 하나가 꽉 들어차 있다. ‘아,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자신의 몸과 얼굴을 들여다보며 어디를 어떻게 고쳐야할지를 고민하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안쓰럽고 슬프기까지 하다.
초등학교 6학년인 여자 조카의 외모로 인한 고민은 시작된 지 오래다. 체중계를 끼고 살고, 눈수술을 하고는 싶은데 칼 대는 것은 기겁하며 매일 거울을 벗한다. ‘너는 충분히 예쁘고 키도 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실력이고’ 하는 식의 조언은 공허하다. 씨도 먹히지 않는다. 여리디 여린 정신을 매순간 흔들어놓는 거대한 매스컴이라는 쓰나미 앞에서는 말이다.
하다못해 아르바이트생만 뽑아도 외모가 우선순위가 된단다. 연애에도, 결혼에도, 가수도 연기자도 아나운서도 우선순위가 외모라는 사실이 암묵적인 사회적 동의를 얻고 있다. 외모가 별로인데 그 분야 최고의 전문능력을 갖춘 사람을 뽑을 것인가, 외모가 뛰어난데 전문능력이 2등인 사람을 뽑을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연기대상 시상을 할때, 연륜있는 연기자들이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어도, 주연보다 조연의 연기력이 훨씬 뛰어났어도 그들에게 최고의 상을 주지는 않는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상을 받는 사람도 불안하다. 자신도 최고점을 찍고나면 외모 주가의 내리막길에 들어설 것이라는 예측이 들어맞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로 빛나고 롤모델이 되는 실력위주의 사회는 뿌옇게 가려있다.
우리사회는 지금 집단 콤플렉스에 빠져있는 듯하다. 우리나라 고유의 얼굴형과 체형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 같다. 서양 백인의 모습을 무의식 깊이 선망하면서 그들의 모습처럼 되고자 애를 쓴다. 보다 하얗게, 보다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적 모습이 우리가 가치를 두는 외모이다. 전통적인 미는 촌스럽게 여겨진다. 철저히 고유의 외모를 지우고 고치고 싶어한다. 큰 것을 섬기는 전형적인 사대주의가 바로 지금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외모지상주의병이다. 활보하는 성형광고와 성형을 권장하는 매스컴의 무분별한 역할에 힘입어 목숨을 건 수술을 감행하는 줄이 오늘도 성형외과 입구마다 길게 늘어서 있다.
가수는 노래를 잘하면 되고, 연기자는 연기력이 좋으면 되고, 아나운서는 목소리와 발음이 좋으면 되고 승무원은 친절하고 짐을 잘 들어올려 줄 수 있는 사람이면 되고… 그러면 되는 건강한 사회, 자신의 꿈을 위해 차근차근 미래를 준비하며 온전하고 건강한 인간으로 살 수 있게 인도해주는 대중매체의 역할을 기대하는 건 정말 돈키호테 같은 희망일까?
비뚤어진 문화와 일그러진 내면을 성형해야 하는 우리 성인들, 종교인들의 자격과 역할을 되짚어보며 주밀한 자기검열의 시간을 갖게 하는 요즘이다.
장오성 교무
원불교 송도교당
장오성 교무 프로필
·원광대 원불교학과 졸업,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 석사
·수원교당 부교무, 원불교신문사 기자
·배내청소년 수련원 부원장
·현 송도교당 주임교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