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한성치과의사회 조직 문화재 강탈 대항 등 애국 활동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4년에 치과의사 면허를 취득해 ‘치과의사 면허 1호’로 기록된 함석태의 발자취를 찾아서 떠난 길은 흥미로우면서도 의미 있는 행보였다.
지난 16일 치협 협회사편찬위원회(위원장 변영남)와 서울지부 협회사편찬위원회(위원장 김평일)가 함께 함석태의 개원지와 그와 연관된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을 직접 발로 찾아보는 역사탐방을 실시했다.
개원 100주년을 기념한 이날 탐방에는 변영남·김평일 위원장을 비롯해 이병태 원장, 박영섭 치협 부회장, 이재윤 서울지부 공보이사가 함께 했다.
우선 함석태의 개원 자리를 먼저 찾아봤다. 함석태는 1912년 일본치과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2월 5일 치과의사면허 제1호로 등록했으며 이어 6월 서울 남부 곡교 부근에서 개원을 했다.
종각역에서 출발, 1907년도에 발간된 지도와 옛날 사진에 의지해 당시의 개원지를 찾는 데 옛 지도에는 ‘함석태’라는 이름이 명확히 표시돼 있었다.개원지에 도착해보니 그곳은 청계천 장통교와 장교동 한화빌딩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지도 참조> 빼곡히 들어선 건물들과 차도 사이의 조그만 삼각형 터 바로 옆이었다.
옛 제창국 자리인데 지금으로 치자면 서울 중구 삼각동이다. 덩그러니 아무런 징표도 없어 표지석을 세우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겨울 초입에 들어선 그곳은 높은 빌딩들 사이에서 쓸쓸한 모습 그 자체였다.
# 개원지 표지석 건립 추진
이어 보신각을 향해 걸었다. 이 곳을 찾은 이유는 함석태가 문화재를 수집해 왔기 때문인데 이는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일면을 보여준다.변영남 위원장은 “일본인들이 보신각 주변에 있는 철문을 철거했는데 함석태가 이를 보관해 고종황제에게 바쳤다는 일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함석태는 서울 광화문 네거리 동북부에 있는 비각의 철제문을 보관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비는 고종황제의 연세가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되는 경사를 기념해 세운 비다.
신재의 원장의 ‘함석태 연구’ 논문에 따르면 “함석태는 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힘을 써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문화재에 애착을 가져 그 열성으로 심지어 기인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또한 문화재를 보는 눈이 탁월했으며 목공예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 중학동 십자각 대문을 구입한 일도 있는데 함석태가 아니었으면 오늘날에 그 문은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함석태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한국인만 회원으로 한 한성치과의사회를 조직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강우규 의사 손녀 입양
위원회는 또 서울역 광장에 세워진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동상을 찾았다.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2일 서울역 광장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 일행을 향해 폭탄을 투척해 한국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함석태는 강우규 의사의 손녀인 강영재를 입양해 이화여전을 보낼 정도로 어려운 형편에 놓인 사람들을 돌보는데도 힘을 쏟았다.
또 안창호 의사를 치료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함석태의 나라와 동포를 사랑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광복되기 한 해 전인 1944년에 고향인 평안도로 갔다가 광복 후 월남을 위해 고향을 떠나 황해도 방면으로 갔으나 그 후의 행방은 알 수가 없다.
박영섭 부회장은 “지금 치과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치과의사의 뿌리를 찾고 기틀을 잡아가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왜 이제야 찾아뵀을까, 좀 더 일찍 올 것을….’ 모두들 두 다리는 고됐지만 마음 한 쪽엔 뭉클함이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