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조명탄, 수십 명의 치인들의 업적, 인생관, 철학을 쓴 논픽션, 그랜드 캐니언 천연 같은 대담집‘나는 사람이 좋다’를 낸 저자 이병태를, 나는 잘 안다. 내가 영어의 몸으로 있을 때, 어느 눈 오는 날 나를 찾아준 유일한 후배다. 그는 내가 국회의원 현직에 있을 때는 나에게 치근대거나 알랑거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원거리에서 자유롭도록 해주었다.
수도육군병원에서 국군수도통합병원으로 편제가 바뀌는 시기에 군대생활을 함께 했고 서울종로구에서 지근거리를 두고 개원하기도 했다. 지금은 대한치과의사문인회(Korean Dentists Pen Club)에서 매월 마주 앉아 책과 글을 읽고 듣곤 한다. 만나면 ‘앵두’ 또는 ‘요로캐’라는 별명을 가진 그의 부인 안부도 꼭 물어본다.
이병태는 1976년 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번역본이지만 ‘사서삼경’을 탐독했고 기념으로 ‘치과보철기공학’을 출간하여 치의학 전공서적 저술 및 출간에 횃불을 들었다. 1977년 1월에 월간치과연구를 창간하고 치과의사 잘 살기 운동으로 서울에 ‘치과의사신용협동조합’설립에 선봉장이 되기도 했다.
‘나는 사람이 좋다’는 전부 월간치과연구에 게재됐던 것이다. 별도로 구성된 정순경, 이한수, 김인철, 김정림 몇 분과 나눈 캐러밴 같은 대담은 흥미진진하다. ‘나는 사람이 좋다’를 읽다 보면 대담자들의 숨소리가 들려 옆에 같이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상대마다 시대의 진실을 구술하여 그 진솔한 풍경에 빨려들곤 한다.
문체는 일기 같다가 시 같은 구석도 있다. 그의 성격처럼 전설의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해설이 있는가 하면 생뚱맞은 신문기사를 읽는 기분도 든다. 때로는 연극 대본이나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배역을 맡은 기분도 든다.
내용은 시대와 그 시대를 산 치과인들의 실제 상황적 스토리이다. 그냥 스토리가 아니라 사실과 업적, 역사적 실황이다. 이 책명은 ‘나는 사람이 좋다’이지만 조만간 후학들이 치의학적 또는 인물 연구에 옹골찬 참고문헌이 될 것을 예언한다. 책명은 일찍이 ‘나는 인터뷰를 좋아 한다’로 정했다는데, 미국 한 영화사의 ‘더 인터뷰’ 사건이 발생하여 고민하다가 주변의 조언에 따라 ‘나는 사람이 좋다’로 바꿨다고 말한다.
이병태 소년은 6·25전쟁 시기에 한번은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았다. 먹지 못해 영양실조로 배가 남산만큼 솟고 사경을 헤맬 때였다. 산 넘어 먼 동네로 피난 온 의사를 모셔왔다. 비록 맨손으로 온 의사였지만 관장만이 유일한 처치라고 했단다. 어머니와 고모는 우물에서 기른 물을 짚불에 데웠고 어렵게 구한 빨랫비누를 풀어 만든 것으로 피난의사가 관장했다. 그래서 오늘의 그가 존재하고 있다. 이쯤 되면 인민군이나 중공군에 관한 감정이 아주 남다를 터인데 1990년대는 중국 조선족자치주의 동포를 위해, 2000년대는 북한동포를 위해 헌신하였다. 모두 사비로 했다. 순수 민간 치과의사, 개인으로 그야말로 멸사봉공이다. 중국 관련해서는 일찍이 ‘북경 연변 그리고 백두산’(1991년)을 발표했다. 그가 적지 않게 알고 있을 북한관련 출간이 기다려진다.
나이 70을 훨씬 넘긴 그에게는 아직도 글 뭉치가 있음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비록 손 흔들기 태극기 이지만 집 거실, 치과 대기실, 주말의 천막 안에 걸어놓고 치과의사의 생을 구가하는 이, 이를 우리 모두는 주목해야 한다.
‘나는 사람이 좋다’는 비매품, 512쪽에 자세한 찾아보기는 읽는 이들에게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글쎄 위인전을 즐겨 읽던 소년 이병태가 ‘휴머니스틱 덴티스트’가 되어 이 책을 내면서 치의학계의 위인들을 찾았노라고 외친다. 서슴없이 강호체현에 일독을 충심으로 권면하는 바이다.
황규선 전 국회의원, 치문회 고문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