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配慮) 아침 출근시간, 우리치과 엘리베이터 앞은 항상 만원이다. 15층 대형 클리닉 건물이다 보니 출근시간이면 먼저 타기 위해서 전쟁을 치른다. 엘리베이터 한 대를 놓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니 다들 하나 둘씩 엘리베이터 문 앞으로 바짝 다가선다. 그러면 나는 뒤로 물러나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곤 한다. 내가 조금 지각해도 나의 출근시간을 따지는 사람이 없으니 작은 배려를 할 수 있어서 즐겁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두리번거리는 어르신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엘리베이터 걸(?)이 된다. 층을 누르는 스위치 자리에 바짝 다가서서 자연스럽게 외친다. “몇 층 가세요? 어르신! ^^”“5층요!… 7층요!”“4층 가시는 분은 안계신가요?”라고 하면 엘리베이터 저 구석에서 외마디 외침이 들려온다.“11층요!!!” “네” 대답하고 나면 층마다 내리는 분들이 안전하게 내리기까지 열림 버튼을 누른다. 7층 문이 열리면 아름다운이 치과 우리 직원들이 먼저 내리게 배려한다. 빨리 가서 출근카드를 찍으라는 배려다. 지각할까봐 엘리베이터 앞에서 뛰는 직원들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진료가 끝나고 환자들이 입을 헹구고 나면 “티슈”라고 종종 외친다. 환자분들은 입술에 묻은 물기를
가족과 함께한 등산의 즐거움 예전엔 등산이 좋은 줄 몰랐다. 아니 그것보다는 산의 고마움을 몰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연세가 많으신 선배 치과의사 분들한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나이 40을 넘기니 예전 한창 때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술을 통해 배운다. 학창 시절에는 힘든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선후배들과 술을 마시고 기껏해야 3시간 정도 자고 또 나와서 공부를 하고 테니스 한번 때리고 나면 개운했었다. 한창 시절까지 안 내려가도 몇년전까지만 해도 술 좀 먹는다 싶었지만 요즘엔 술자리를 골라서 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몸을 챙기게 되고 뭐 좀 좋은 거 없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러던 중 집 앞에 조그만 산 하나를 발견! 일단 혼자 올라 봤다. 등산이라고 하기엔 좀 민망한 높이. 그러나 도심에 자리잡고 있는 산이지만 공기부터가 다르다. 더욱 매력적인 것은 두 아들래미와 결혼하기 전 몸매를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 없는 몸매를 갖고 있는 와이프도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높이다. 그래도 동네 뒷산이라 하여도 산은 산이지 않은가? 가끔 숨이 턱턱 막히는 구간이 있지만 이게 산의 매력이다 싶어 움직이기 싫어라 하는 가족들을 이끌고
응석사 지난 주말 나는 마음이 맞는 오랜 친구와 함께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 잠시 몸과 마음이 쉴 수 있는, 눈과 귀가 쉴 수 있는 곳으로 여행지를 잡기로 하고 고민하던 중 출가하여 스님이 된 친구가 떠올랐다. 8년 전 쯤 알게 된 친구는 어느 날 스님이 되겠다며 속세를 등지고 해인사로 들어갔다. 지금은 경상도 어디 절에 있다고 했는데… 산 속 고요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면 하룻밤 신세를 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에 연락을 취했고, 흔쾌히 그는 허락했다. 함께 가기로 한 친구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기에 그녀는 기쁜 맘으로 여행길에 올랐고 나도 오랜만의 여행에 마음이 설레었다. 우리가 다녀온 응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로, 집현산(集賢山, 높이 572m) 동남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절로 올라가는 길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둡고길고 구불거려 오르는 내내 겁이 났다. 절에서 일을 봐주시는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요즘 같은 여름 날씨엔 동네 주민들이 그냥 도로에 멍석 깔고 길에서 잠을 청하기 때문에 올라오는 동안 사람
연아이글스를 생각하며… 20년전 우리는 막연한 의문을 가지고 모임 하나를 만들었지. 언젠가 먼 훗날에 이 모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 지난 5월 29일 수원에서 치러진 ‘연아이글스 창단 20주년 기념식’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행사 내내 흥분하며 상기 되었고, 때론 시간 앞에서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날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떠오르자 옛이야기가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잠시 나는 꿈을 꾸듯 그날로 걸어 들어가 본다. 연아이글스는 연세치대 축구부의 졸업생 모임이다. 따라서 1991년에 창단되었지만 1970~80년대의 학창시절의 추억들이 이 모임의 근간을 이룬다. 지금도 생생하지만 처음 축구부를 노크하던 날, 그 가족 같은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는 집을 떠나 처음으로 세상이란 큰 조직에 속한다는 벅찬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때 가슴에 새겨진 첫인상은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었다. 이렇게 나는 축구부에 빠져들어 갔다. 6·9제를 준비하는 짧은 봄날의 에피소드지만 축구부는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었다. 모두가 낮에는 축구선수였고 밤에는 술꾼이 되어 닭똥냄새나는 신촌시장을 배회했었다. 마치 인생길에 미처 나서기도 전에 지쳐
24시간주! 5월 7일(토) 오전 11시~8일(일) 오전 11시까지 24시간주 국가대표선발전이 한국체육대학교트랙에서 13명의 24시간주와 11명의 12시간주(A조-2명, B조-9명)선수가 참가 한 가운데 열렸다. 체대생과 실업선수들 훈련이 늦게 끝나서 12시반부터 시작했고 12시간주는 200바퀴 80km, 24시간주는 400바퀴 160km가 최소완주 기준이다. 국가대표선발자격은 220km(550바퀴)이상이며 4시간마다 트랙도는 방향을 바꾸고 각자의 개인부스가 있어서 음식과 물, 개인봉사자 등을 둘 수 있다. 12시간주는 24와 같이 출발과 12시간 지난 후에 출발하는 두 팀으로 나눴지만 거의 B조로 출발했다. 목표는 180km, 450바퀴로 세우고 다른 선수들의 거리와 속도는 신경쓰지 않기로 하고 천천히 뛰기로 했다. 30km를 달린 후 처음으로 5분가량 쉬며 빵과 물을 마셨고 50km(125바퀴)를 마치고 죽과 좋아하는 족발을 먹으며 힘을 충전했다. 저녁이 되어 선선 해져서는 조금씩 속도를 올리는데 초반에 오버한 몇 몇 선수들은 기권을 했고 클럽회원들이 응원을 오기시작해서는 더 힘이 나기 시작했다. 회원들의 도움으로 맛사지도 받고 맛
봉사가 벼슬이 아닌데… 봉사를 하긴 오래 한 것 같다. 1974년 학창시절부터 의료봉사를 했으니 근 40년이 되어간다. 1970년대 국내 의료봉사는 신바람 나는 봉사였다. 농어촌마다 서로 자기네 고장으로 진료를 와 달라고 성화를 했으니 말이다. 정말로 봉사 할 맛이 났었다. 요새 국내 의료봉사는 거의 사라지고 의료보험 때문에 환영도 받지 못 한다. 대신 해외 의료봉사는 종교단체, 각종 봉사단체, 여러 의치과대학교가 서로 가겠다고 벌떼 날듯 난리다. 나라가 그 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게다. 그런데 해외 의료봉사에 대해 말이 많다. 혹자는 말한다. 3~4일의 해외진료로 무슨 의료봉사가 되겠는가? 어떻게 3~4일 만에 병을 고친단 말인가? 이는 자신들의 낯내기 봉사지 진정 그 곳 사람들을 위한 봉사가 아니다. 이런 봉사는 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한다. 다른 이는 이렇게 말한다. 3~4일의 봉사가 어때서? 봉사를 안 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더 좋아? 우리의 6·25 때를 생각해 봐. 힘들고 배고프고 아플 때 작은 도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희망이 되었는지를 6·25 경험을 통해 잘 알 수 있잖아? 봉사에 덧칠을 해서는 안 된다. 그냥 봉사 그 자체만으로 큰 뜻이 있는
제1648번째) 세부분과학회란 무엇? 김여갑 경희대 치전원 교수 전 치의학회장 우리는 생각이 많을 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난다고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고민이 많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민이 많을 때는 고민의 목록을 만들어서 내가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나누고, 그리고 어느 것을 먼저해야하는지 우선 순위를 정해서 하나씩 해결 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오만가지 생각 중에 실제로 지금 내가 할 수 있고, 꼭 해야 하는 일은 몇 %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필자는 원래 단순하고 간결하게 신속히 일을 진행하는 편으로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요즘 새삼스럽게 영어공부를 하면서 주어진 주제로 이야기해야 하므로 말할 내용을 만들기 위하여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치의학회장으로 3년은 필자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학회 활동을 30년 가까이 해왔지만 치의학회와 대한치과의사협회의 3년은 또 다른 재미를 갖고 일을 했지만 생각도 많았다. 그래서 치의학회장을 하는 동안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들을 기획하고 시행했지만 앞으로
천리포 수목원 기행 나는 1993년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부부동반으로 버스 1대 대절하여 올 3월 5일(토) 수목원에 다녀온 바 있다. 그 친구들은 연대 야간 경제학 공부를 같이 했던 동기생들이다. 우리는 연간 2~3번 국내여행과 2년에 1번정도 해외여행도 함께 다니곤 한다. 원래 이 수목원의 설립자는 민병갈 독일계 미국인 Carl Ferris Miller(1921~2002)씨이다. 그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는 1945년 23세에 미군정보장교로 입국하여 우리나라에서 살았다. 그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으로 1979년에 귀화하여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 이 수목원의 비공개 지역(후박나무집 뒷산)에 안장되어 있다. 이곳은 한국 최초의 민간 수목원이다. 그는 한때는 한국은행 고문으로 지낸바 있으며 평생 총각으로 홀로 살았다. 그는 미국에 있는 어머니를 항상 그리며 사랑하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수목원의 설립연도는 1962년에 부지매입하고, 1970년에 수목원 조성사업을 시작했다. 전체 면적이 187.065평이며 밀러가든이 18.532평에 이른다. 주요 5가지 수목은 목련 400여 종류, 호랑가시나무 370여종, 무궁화 2
스승을 갖는다는 것 얼마 전 스승의 날 행사를 했다. 내가 당신들의 제자였듯이 나도 공직에 남아 교육을 시키다 보니 세 번의 스승의 날 행사를 했다. 나의 석사 지도교수님 모임과 나의 박사 지도교수님 모임 그리고 내 제자들이 마련해준 나를 위한 행사. 석사 때 나를 지도해 주신 스승님은 고희를 넘기셨으나 아직도 정정하시고, 내 박사때 지도교수님은 지천명을 훌쩍 넘기셨지만 열정 가득한 청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계심에 감사함과 더불어 부러운 마음을 가져보았다. 그리고 30대인 나의 제자들, 그 사이에 나는 이미 불혹을 지나 40대 중반의 스스로는 부족함이 많다고 느끼는 중년의 구강외과의가 되었다. 내가 모시는 스승이 계심에,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제자들이 있음에 고마움을 느끼며 매 해 스승의 날을 맞이 한다. 하지만 내 아이들을 보면 옛날과는 사뭇 다른 학교생활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 선생님과의 관계가 예전 같지는 않아 보인다. 더구나 초등학교에서는 촌지근절이라는 이유로 한때는 스승의 날 학교를 휴교하기도 하고 자그마한 선물도 가져가지 못하게 하니 세상이 좋아졌다고 하기에는 왠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체벌이
정보의 홍수와 지구의 날 요즈음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전자기기에 익숙해져 집안밖에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나 그것들을 유용하게 사용하면서 음악을 듣거나 지구촌너머 만나보지도 않은 친구들과 관심이 비슷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러한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 시켜주기 위해 하루가 멀다하고 보다 편리하고 세련된 제품들이 나오고 대대적으로 홍보까지 하고 있다. 전자매체들의 이러한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만만치 않다.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이러한 전자매체를 통해 게임이나 놀음에 중독되어 가정이 파탄되고 어린아이를 방치한 기성세대들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가끔 접한다. 이러다 보니 책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전자매체를 켜면 수많은 정보와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있으니 도서관에 갈 필요도 없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또한 시간만 나면 전자기기를 가지고 몇 시간이고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가상세계에 빠져 현실감각이 무뎌지고 자연의 모체인 대지와 바다와는 점점 멀어지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고력도 서서히 녹이 슬고 있는 듯하다. 오늘도 출근하니 입구 우체통에는 수많은 관련 잡지와 신문, 편지들(대부분
성각(成覺)스님의 선 서화(禪書畵)전에 가다 화사한 벚꽃이 피는 가 싶더니 갑자기 날씨가 차가워 비바람이 몰아쳐 올해도 싱겁게 벚꽃이 다 저버려 구경 한번 못하고 말았다. 이제는 이번 주말 추풍령 영운만(嶺雲堂)에 가서 피기 시작한 영산홍을 구경하기로 작정을 하고 있는데 예술의 전당에서 성각(成覺)스님의 선 서화(禪書畵)를 구경 하자고 며칠 전 부터 미술을 전공한 큰딸이 조른다. 전시기간이 너무 짧아 일주일 동안 이라니 오늘 수요일 직장이 쉬는 기간에 못가면 이마 저 놓칠 거라는 성화에 오전에 나섰다. 가면서 차안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큰딸이 TV에서 잠깐 비친 성각스님의 선 서화를 보고 느낀 소감이 탈속의 경지에서 붓끝에서 단숨에 나오는 선(線)은 수천 번 수만 번의 반복에서 오는 달관과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만 나오는 선(線)이라고 입이 마르도록 열을 낸다. 아니 서양화를 전공한 사람이 동양화 영역인 스님의 선 서화에 탄복하고 격찬을 하다니 의외이다. 듣고 보니 나도 은근히 기대 속에 예술의 전당에 갔다. 한가람 전시장이 아니라 서화 박물관에서 한다고 안내인이 말하고 입장료는 무료라고 한다. 박물관 3층에 마련한 전시장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