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2 (일)

  • 맑음동두천 11.3℃
  • 맑음강릉 16.4℃
  • 박무서울 11.9℃
  • 박무대전 11.3℃
  • 대구 17.0℃
  • 흐림울산 17.3℃
  • 황사광주 12.6℃
  • 흐림부산 17.7℃
  • 구름많음고창 12.8℃
  • 흐림제주 16.7℃
  • 맑음강화 11.1℃
  • 구름많음보은 11.0℃
  • 구름많음금산 11.7℃
  • 흐림강진군 15.2℃
  • 흐림경주시 17.5℃
  • 흐림거제 18.1℃
기상청 제공
기사검색

당신이 잠든 사이/콩트 1

당신이 잠든 사이
                                                  

혜승은 어두운 아파트 층계를 따라 2층 현관문 앞에 섰다. 새끼손톱만 한 모기떼들이 새까맣게 콘크리트 천정을 점령하고 있는 게 못마땅했다. 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가 집안에 들어갈 기회만 엿보고 있는 놈들이었다. 그는 녀석들이 들어오거나 말거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광수와 인나 부부가 거실에서 그를 맞이해줬다. 그는 말할 기운조차 없어서 눈인사만 하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광수 부부는 3년 전부터 그의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었다.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채로 그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셔츠 소매에 Dr. Jung이라고 자수로 새겨 있었다. 온몸이 멍석말이를 당한 것처럼 쑤셨다. 타이레놀이 든 약상자가 있는 주방 선반까지 가는 건 죽기보다 싫다고 생각하다가 정신을 잃었다.
 
 잠든 사이 누군가 석고를 목구멍에 조금씩 밀어 넣어서 좌﹡우측 폐에까지 잔뜩 채워진 석고가 열을 내며 굳어가는 것 같았다. 숨이 멎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발작적인 기침을 해댔다. 혜승은 잠시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 거실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승 씨 말이야, 아들한테 좀 심하지 않아?” 따지듯 여자 목소리가 열린 문틈을 파고들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부모를 속이고 여자친구와 호텔에 놀러 가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중저음의 목소리가 응수했다. 연우 얘기였다. 아들 때문에 속앓이하는 아내를 문병하러 온 친구들이라고 생각하며 혜승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다시 감았다.

 약학전문대학원 시험 준비를 위해 신촌에 있어야 할 아들이 춘천의 한 호텔에서 카드를 사용했다는 아내의 문자를 받고 그는 혜민 스님의 말을 떠올렸다. ‘부정적인 생각의 흐름을 멈춰라.’ 그러나 부모 앞에서 뻔뻔하게 말대답하는 아들을 마주하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말다툼이 결국 몸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서른 살인데 애인이랑 데이트할 수도 있는 거지, 꼰대처럼 따지는 꼴이라니.” 여자는 비아냥거렸다. 뒤이어 위협적인 목소리가 갈라지며 쉰 소리를 냈다.
 “대학 졸업하고 5년째 PEET 시험 준비한답시고 허송세월만 하니 그렇지. 혜승 씨가 스트레스성 난청 때문에 보청기를 끼어야 할 지경이라잖아.”
 “요새 오냐오냐해줬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이 양반이.”
 “이런 버르장머리하고는 감히 누구에게 삿대질하는 거야?”

 중저음의 쉰 목소리를 끝으로 우당탕하면서 거실에서 뭔가가 부서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혜승은 침대에서 거실로 달려 나갔다. 광수 부부가 놀란 눈으로 혜승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들이었지만, 덩치가 큰 광수가 인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광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균열이 생긴 대형 수조 바닥에 돌로 만든 계단이 떨어져 있었고 수초들은 허리가 꺾여 있었다. 광수가 혜승의 눈치를 보며 조르고 있던 인나의 목을 슬며시 풀었다. 인나는 수조 밖으로 물이 흘러넘칠 정도로 물장구를 치며 혜승에게 다가왔다. 거북이가 배고플 때 주인을 반기는 몸짓이었다. 혜승은 흐리멍덩한 눈에 초점을 맞추려 애를 썼다. 혜승은 방문을 하나씩 열어보면서 수조 쪽을 힐끔거렸다. 그때, 그의 손에 들려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서둘러 응답 버튼을 눌렀다. “여보, 연우가 강원대 PEET 시험에 합격했대요.” 그제야 혜승은 온몸을 짓누르던 통증이 싹 가셔버리는 걸 느끼며 거실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