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 꼬깃꼬깃해진 종이 위에 시냇가 징검다리처럼 꾹꾹 눌러 쓴 새까맣고 단단한 글씨 발이 달려서 어딘가로 줄행랑 이 세상 틈새로 사라졌다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아련한 기억을 붙들어 세우고 새하얀 머릿속을 이 잡듯이 뒤져봐도 결국 붉은 입술이 터지고 가슴은 새까맣게 쪼그라들었다 인절미에 조청 찍은 맛 그 맛을 잃어버렸네 눈코입 손가락 그대로인데 나 아닌 누구일까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
오늘 마음들 단단히 잡수세요 첫눈이 올지도 모른답니다. 불멸의 시간 사이 바람 옷을 입고 잠든 당신을 찾아낼 겁니다 오늘 마음들 단단히 붙잡으세요 달곰한 봉숭아 꽃물 흥건하게 흘러넘칠 때 첫사랑 마수걸이 시간입니다 오늘 마음들 단단히 잡수세요. 아침 까마귀 울고 모퉁이 금 간 접시 바닥을 나뒹굴어도 그 사람 떠올라 하나 두울…… 숨을 고르고 먼 하늘 가나안 땅 아부지 작은 누야 기어이 죄 많은 땅에 내려 내 마음 설레게 하네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
귓가에 살랑살랑 입김을 불어도 흔들리는 법이 없다 사람 따위인 양 아랑곳없이 땅속에서 보낸 인고의 시간에 취해 눈에 뵈는 게 없다 애써 인연을 만들러 서성이지도 외롭다 두렵다 힘들다 비명도 없이 메롱메롱 두 날개를 비벼 가며 사람들을 을러댄다 가던 길 멈추고 물끄러미 추파를 던져본다 타원형의 검정 얼룩에 날개의 경계를 비상하게 맞추고 보란 듯이 구애를 하고 있다 매미에게 나무가 달라붙어 있다 완벽한 보호색 신통방통한 처세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만지지 말고 바라만 보았으면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
슬픈 새벽녘 비몽사몽 눈앞에 어른거리는 어두운 그림자 무섭다 이불속에 숨어들어 생사부(生死簿)를 고쳐 쓴다 일하러 간다 영혼일랑 차 안에 던져두고 쇠나막신 타박타박 앞서가는 할마시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면 위에 붕어마냥 뻐끔뻐끔 숨을 쉬는 당최 숨이 쉬어지지 않네 오늘 하루도 깜장 물 노랑 물 혈관에 들이붓고 눈물을 감추기 위해 마스크를 고쳐 쓴다.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
'우리 부모는 나에 대해 1도 몰라' 낯선 이야기 설익은 입술에서 사람 홀리는 날 선 눈빛 우린 왜 함께 살지 왜 노려보는 거야 마음을 모르겠어 도대체 왜 그러니 아이들을 1도 모르는 내 입술 잔소리로 부은 목이 통뼈처럼 굵어졌다 자정을 넘긴 시각 다시마 멸치로 육수를 내고 수프는 2/3만 묵은 김치 곁들여 보글보글 라면 끓는 소리 이 방 저 방 아이들 젓가락 챙기는 소리 울 엄마가 그랬어 “아들 은혜를 다 갚으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위에서 아래로 사정없이 사랑이 흐른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싶을 때 밥 잘 잡숫는다는 엄마 옛날보다 용 됐다는 아이들 그래 그거 하난 건졌네 그거면 충분하지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
두근대는 붉은 부겐빌레아* 바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너 우산 밑으로 거품처럼 터지는 초록색 웃음 배를 드러내고 꼬리를 흔드는 잔디 우리를 부르는 숲길에는 인색한 스테인리스 삼각형 분수대 하나 반가운 부레옥잠 여럿 이곳에 이사 온 지 얼마나 되었을까 여름 달빛에 흔들리는 미친 사랑 수런거리는 빗소리, 또 빗소리 네 손가락 사이로 떠오르는 미코노스* 해변의 밤바다 후드득 우듬지를 내려치는 겨울 소낙비 얼어붙은 미코노스 해변 부레옥잠 빼앗긴 스테인리스 분수대 어디로 데려간 걸까 난, 빈 껍질만 남았어 물기 없는 너의 목소리 웃음기 사라진 네 흰 블라우스 너와 다른 세상에 산다는 나 더는 아무것도 줄 게 없다던 너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너와 나 불편한 침묵 불면의 새벽마다 널 위해 기도할게. 화살기도 하듯 아픈 배를 그러쥐고 아파, 너무 많이 아파져 그곳을 꾹꾹 눌러서 달랬지 손을 떼면 금방 네 숨이 멎을까 허리가 활처럼 휜다 꺼멓게 타들어 간 네 입술 자국 사금파리 씹어낸 내 삐딱한 입술 첫사랑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말 그 말을 듣지 말 걸 네 말을 믿지 말 걸 내 눈을 후벼 팔 걸 너는 자궁을 잃었고 나는 시력을 잃었다 나는 네 안에서 길을 잃었다 ----
자꾸만 착각해 어디쯤 널 지지해 줄 누군가 두 손 모아 기다릴 거라 두리번두리번 선택이 틀렸다 깨닫는 순간 후회는 사정없이 숨통을 조여와 삶은 저만치 돌아누워 침을 뱉고 네 옷을 찢어버리지 혼자야 넌 혼자라고 열 손가락 깨물어 다 아픈 전화기 너머 목소리 애쓰지 마라. 애쓰지마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로뎀나무 아래 지친 너를 뉘시는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임용철 원장 선치과의원 <한맥문학> 단편소설 ‘약속’으로 신인상 등단 대한치과의사문인회 총무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2013 치의신보 올해의 수필상> 수상
우리 치과가 있는 골목에 새로 독립서점이 문을 열었다. 내 눈은 31가지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을 수 있다는 가게 옆을 지나가는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서점은 꽃으로 뒤덮인 세이렌들이 사는 안테모사 섬처럼 점심을 먹으러 나서는 길 중간쯤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 날엔 서점 유리창에 아이들이 크레용으로 그린 동그라미와 꽃, 사람, 헵타포드 외계인들과 교신이 가능할 법한 낙서와 같은 그림들이 눈에 띄었고, 다른 날엔 하얀색 커튼 너머로 젊은 엄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오월의 햇살 아래를 꿈꾸듯 걷는 내게 ‘모락’이 달콤한 노래를 부르며 다가왔다. 그 자리에 이전에도 서점은 있었지만 내게 들어오라 말을 건넨 적은 없었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자 벽에 지른 선반에 다양한 제목의 동화책들이 키를 재듯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책들이 오밀조밀하게 포개져 전시돼 있었다. 창가에는 아기자기한 골판지로 만든 자동차 장난감과 아이들의 글을 모아 만든 작은 책들이 지나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곳에서 성인들을 위한 독서 모임 같은 게 열리나요? 아니요, 아직은 독서 모임은 따로 없습니다. 책방지기 선생님은 나의 얘길 듣고
명성 호텔 라운지 레스토랑에서 민혁은 순영의 부모님과 저녁 식사가 약속 돼 있었다. 라운지 안에는 제이슨 므라즈의 이란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뵈는 창가 자리였다. 마천루들 사이로 정체된 차들의 불빛이 크리스마스트리 알전구들처럼 보였다. 순영은 이번이 아버지를 설득시킬 마지막 기회라고 말했다. “오빠, 오늘은 아빠 마음에 꼭 들게 말해야 해.” 순영이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다. 호텔의 입구 쪽에서 순영의 부모님 두 분이 걸어 들어왔다. 민혁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넙죽 인사를 했다. “두 분 오시느라고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별히 야경이 멋진 창가 자리로 예약해두었습니다.” 순영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민혁은 라운지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친구와 통화 중이었다. 순영은 민혁을 놀라게 해주려고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갔다. “잘 지내지? 결혼? 응 조만간 할 거 같은데. 장인 되실 분이 보건소 그만두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개원하라고 성화셔서 말이야. 데릴사위? 말도 안 되지. 우리 어머니는 어쩌고. 보건소를 그만두긴, 지금 개원환경이 얼마나 안 좋은지 뻔히 아는데. 제주도에 내려가서 개원하는 척하면서 일단 결혼하면, 순영이든
민혁이 술값을 계산하고 나오자, 박 교수는 그새 담배 한 대를 더 태우고 있었다. “프로토타입을 끼던 환자는 젊어서부터 술, 담배를 입에 달고 살았다더군. 늘그막에 구강암에 걸려서 혀 절제술을 받았는데, 피부판 이식술과 3D 프린팅으로 인공 혀를 재건할 수 있다고 했더니 자기는 울퉁불퉁한 혀는 싫다더군. 그래서 프로토타입이 탄생한 거지. ”박 교수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민혁을 데리고 자신의 연구실로 갔다. 1층은 학부생 실습이 진행 중인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올라갈 때쯤 순찰을 하던 나이든 경비원이 박 교수를 알아보고는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다. 복도 끝에 연구실을 향해 걸어가자 자동으로 복도 천정에 등이 켜지면서 어둠이 물러갔다. 박 교수는 민혁과 함께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아색 가운으로 갈아입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문에는 ‘씹고, 말하고, 소통하고’란 제목의 칼럼이 펼쳐져 있었다. “어때, 사진 그만하면 봐줄 만한가?” “네, 잘 나왔네요.” “하하 그런가? 내가 머리숱이 좀 없어 그렇지. 사진발은 괜찮지.” 연구실 우측 벽면의 책꽂이 옆 철제 캐비닛 쪽으로 다가간 박 교수는 맨 위 칸 서랍을 열고 은색 철제 가방을
혀를 되찾은 민혁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보건소로 출근했다. 최 과장은 괜히 소장님 심기만 건드렸다고 짜증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졌다. 그는 휘파람을 한 번 불어보았다. 혀 보형물이 입안에서 스스로 자리를 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민혁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구강보건실로 들어갔다. “얼른 울음 뚝 못 그쳐. ”치과 진료용 의자에 앉은 아이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위생사가 아이를 달랬다. “약을 두 번 바르고 빛을 쪼여주면 끝. 어때 쉽지.” 아이는 엄마와 민혁을 번갈아 불안한 눈초리로 바라봤다. 아이는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 채 버텼다. 그러자 엄마가 아이를 낚아채고는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아이를 꾸짖는 소리가 복도를 사납게 울렸다. 이윽고 아이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때 민혁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혀가 저절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혀 보형물이 부풀며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렇게 윽박지르면 아이가 조용해지나! 당신은 부모로서 자격이 없어.” 민혁은 속사포처럼 말을 뱉고는 이내 놀라 입을 다물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목구멍에서 맴돌던
민혁은 M치과대학병원 구강악안면외과 주임교수인 박병삼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박 교수는 그가 졸업한 치과대학의 은사였다. 연구실은 복도 오른쪽 맨 끝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박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우측 벽면에 책장 세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고 그 옆으로 철제서랍장이 있었다. 좌측 벽면에는 클래식 기타 동아리 지도교수답게 보면대와 기타가 벽에 기댄 채 놓여 있었다. 학생들의 과제물이 수북이 쌓여 있는 박 교수의 책상 위에는 여러 권의 책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민혁은 《언어중추에 관한 연구보고서》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중간지점에 ‘뇌의 언어중추 영역 브로카 베르니케’라고 적힌 인덱스 부분을 펼쳤다. 책 하단에 다음과 메모가 적혀 있었다. 뇌에서 말을 만들어내는 브로카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혀 보형물 프로토타입(원형, 原型), 말을 이해하는 베르니케 영역 뇌파를 활성화시키는 B타입, 두 영역 모두 활성화시킬 수 있는 C타입. 잠시 후 박 교수가 연구실로 들어오자 민혁은 서둘러 손에서 책을 내려놨다. 민혁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했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정수리를 겨우 가리고 있었고 그는 습관처럼 머리를 왼쪽으로 쓸어 올렸다.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