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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 in Germany’의 바탕엔 무엇이 있었을까

Relay Essay 제2495번째

‘Made in Germany’ 전 세계 어디에서든 독일제 제품들은 사랑을 받는다. 모두가 꿈꾸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들뿐만 아니라 전자제품, 주방용품, 비타민, 최근에는 유기농 제품들까지, 사랑 받는 제품들의 스펙트럼 또한 매우 넓다.

 

이렇게 독일 회사의 다양한 제품들이 사랑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정교한 기술력, 뛰어난 성능, 안정성 등일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은 어떻게 이러한 이미지를 얻게 되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독일은 1871년 통일된 독일 제국(Deutches Reich)을 그 모태로 한다. 19세기 초부터 자본주의 경제와 산업화의 발전이 빠르게 진행된 영국과 비교해 본다면 그 발전이 매우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독일은 위의 나라와 달리 탑다운 방식 즉, 국가 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독일 경제를 이루고 있는 집단은 크게 자본가, 기술을 가진 장인, 노동력을 가진 노동자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 사이의 갈등이 심했다. 자본가들은 기득권을 잃지 않길 원했고 장인 집단은 그런 자본가들을 자신들을 억압하는 탈취자들로 여겼다. 기술이 없는 노동자들은 경제적 어려움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다.

 

이렇게 각자의 입장이 다른 세 집단 사이에서 독일 제국 정부는 국력의 기본이 되는 경제 성장을 위해 조율을 해야 했다. 자본가들이 세운 기업에 장인들의 연합단체(길드)에서 행해져 내려오던 도제식 교육을 도입하고 자본가와 장인들이 함께 상생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어 장인들은 착취와 억압 없이 편히 일할 수 있는, 자본가는 전에 없던 기술력과 노하우를 통해 기업의 성장을 얻을 수 있는, 노동자들은 장인들에게 교육을 받아 숙련공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이 성공적으로 정착됨으로 인해 기업들은 기술력과 노동력 그리고 장인이 만든 제품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얻게 되었고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이에 따라 얻게 된 기업의 이익이 장인과 노동자들에게 합리적으로 분배될 수 있도록 정부가 관리함으로써 모두가 상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여러 분야의 장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기술력과 노하우들을 끊임없이 전수하고 후배들을 양성하며 쌓인 데이터베이스가 지금 독일이 여러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정부의 주도 하에 세 집단이 위아래로 층이 나뉘는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에서 서로 돕는 구조가 만들어지며 이 결과를 이루어 낸 것이다.

 

우리가 일하고 있는 치과분야는 유럽에서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 과거 1800년대 초까지 유럽에서 치과치료는 학문적인 기본이 정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외과의사나 이발사 등 비전문가에 의해 행해졌고 치아 보철물 또한 전문가가 아닌 여러 분야의 기술자 장인들이 제작하였다. 1800년대에 들어 프랑스를 시작으로 당시 프로이센 왕국이었던 독일에도 치과시험이 생기며 치과의사라는 직업이 정식적으로 생겨나게 되었고, 이후 재료의 발달로 치과의사의 주문을 통해 금속세공사, 도공, 조각가 등이 치과보철물을 제작하기 시작하게 되며 이 중 치과보철물에 관심을 가지고 보철물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처음 보철물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를 설립한 사람이 현재 Dentsply사의 전신인 영국의 Claudius Ash and Sons사를 설립한 Claudius Ash이고 곧이어 스위스에서도 Arnold Biber가 현재의 Dentaurum사의 전신이 되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두 설립자 모두 원래의 직업이 은세공사이다. 이렇게 보석세공이나 조각과 같은 예술과 관련된 사람들이 보철물에 관심을 가지고 제작을 전문으로 하며 생겨난 직업이었기 때문에 당시 독일에서는 이들을 치과예술가(Zahnkunstler; Dental artist)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치과예술가들이 치과의사의 주문을 거치지 않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고 보철물을 만들어주는 일들이 늘어나고 심지어는 신문의 광고를 통해서 영업을 늘려가면서 치과의사와 치과예술가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1900년대 초 당시 독일 치과의사연합회와 치과보철물 제작연구소연합회가 처음으로 협의를 시작하였고 이때부터 치과기공사(Zahntechniker; Dental technician)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후 1956년 위의 두 단체로부터 발전한 독일 치과의사협회와 독일 치과기공사협회는 상호 보완적인 협업을 약속하게 되는데 이때 이루어진 약속은 ‘치과기공사는 환자에게 직접 보철물을 시적하는 것을 포기하며 치과의사는 타당한 치과기공사의 지위와 존재를 위해 돕고 지원할 것을 기꺼이 보장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협의를 바탕으로 두 단체는 현재까지도 서로 협력하며 상호를 존중하고 배려하여 독일 치과계의 발전을 이끌어 냈다.

 

지난 8년 동안 나는 독일에서 치과기공사로서 많은 경험을 했다. 골드 크라운을 포세린으로 바꾸고 싶어 온 한국인 환자의 지대치 상태와 크라운을 보고 그 실력에 놀란 한 치과원장이 동료들과 함께 그 케이스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인 치과기공사로서 또 우리나라 치과의사의 실력에 대해 자부심을 갖기도 했고, 때로는 거래를 하는 치과의사들과 보철물에 대해 함께 의논하고 동료 기공사와 토론하며 치과보철물에 대한 전문가라는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각 분야의 전문가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환경 속에서 열린 협력(Open Cooperation)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이것은 곧 바로 작업 능률의 상승과 만족도로 이어지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다.

 

하지만 지난 8월 한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보고 경험한 것은 너무나도 달랐다. 치과와 기공소 간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치과기공사간의 관계 또한 너무나 곪아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물론 활발한 소통을 통한 발전적이고 서로 시너지를 이루는 관계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업계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포스코경영연구원의 한 수석연구원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인더스트리 4.0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을 주창한 독일과 우리나라의 상황을 비교 분석한 자료에 이러한 내용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지상 과제인 효율성 추구를 위해 수직적인 관계를 추구해 왔고 이러한 문화는 기업간의 협력은 고사하고 한 기업 내, 또는 한 부처 내의 협업조차 이루어지지 않게 하며 결국 이러한 문화를 버리지 못한다면 앞으로의 변화에 매우 큰 장벽이 될 것, 즉 70년대부터 이어져온 수직적 문화를 버려 미래의 효율을 위한 현재의 비효율의 추구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지금 4차 혁명이라는 큰 변화의 시작에 직면해 있다. 치과계도 이미 이 큰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 속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치과계를 이루고 있는 치과의사와 치과기공사 그리고 치과위생사는 직종 내와 직종 간의 진정한 Open Cooperation이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수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