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석 원장
·치의학박사
·춘천예치과 대표원장
<세상을 읽어주는 의사의 책갈피>,
<이짱>, <어린이 이짱>,
<치과영어 A to Z>, <치과를 읽다>,
<성공병원의 비밀노트> 저자
의료인은 늘 말과 기록으로 살아갑니다. 진료 차트에는 수많은 증상과 수치들이 나열되고, 설명은 명확하고 간결해야 하며, 환자와의 소통에서도 직설과 이해 중심의 언어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오래 지속하다 보면, 언어의 숨결이나 감정의 결이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시(詩)를 읽는 일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시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 언어의 밀도가 높습니다. 함축적인 표현 속에 작가의 마음과 세계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소리보다 침묵이, 문장보다 여백이 더 큰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합니다. 치과의사라는 정밀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시는 또 다른 감각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시를 읽는 일은 자신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최근 SNS에서 짧은 글들이 ‘현대의 시’라 불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물론 그 표현의 자유로움은 반갑지만, 시는 단순히 짧다는 이유로 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는 짧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단 한 줄 안에 우주를 담아내려는 시인의 감각과 훈련은, 우리가 흔히 소비하는 콘텐츠와는 결이 다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짧은 콘텐츠에 익숙한 시대이기에 시와 더 가까워질 수도 있습니다. 짧은 만큼 더 많이 생각해야 하고, 천천히 음미해야 하니까요. 바쁜 진료실에서 늘 환자의 말만 듣던 우리가, 오랜만에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 시는 삶의 구석에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우리를 위로할 것입니다.
짧고 자극적인 메시지에 익숙해진 지금의 우리,
정제되고 담담한 비숍의 언어를 통해 내면을 위로
『우리는 내륙으로 질주한다』 봄날의책, 2025
엘리자베스 비숍은 20세기 미국 현대시의 가장 단단하고 정직한 목소리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그녀의 시집 전부와 미발표 원고까지 아우른, 거의 모든 시를 담은 전집으로, 비숍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출간되었습니다.
시집의 제목처럼, 그녀의 시는 자연과 여행이라는 겉모습을 띠고 있지만, 결국은 ‘내면으로의 질주’를 보여주는 정교한 감정의 탐험입니다. 비숍은 여성 시인이자 레즈비언, 타인의 세계에 늘 조금씩 발을 들이지 못했던 outsider였습니다. 격식과 절제, 동시에 정직한 고백이 어우러진 그녀의 시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깊은 고독과 사랑, 상실을 담담히 기록합니다. 삶의 균열과 그 틈새에서 피어나는 언어는, 시대를 넘어 오늘날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특히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평생 ‘진짜 집’을 찾아 떠돌았던 그녀의 삶은, 일상 속에서 치유와 의미를 찾는 우리 의료인들의 정서와도 닿아 있습니다. 시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보편의 언어로 번역하는 힘을 지니는데, 비숍은 그 힘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구현해낸 시인입니다. 우리가 매일 환자를 마주하며 겪는 감정과 생각, 그것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절제 역시 비숍의 시를 통해 환기될 수 있습니다. 정제된 언어로 고요한 진실을 품은 이 시집은, 짧고 자극적인 메시지에 익숙해진 지금의 우리에게 시가 왜 필요한지를 다시 묻습니다.
치매 걸린 신경과 의사가 삶의 존엄성을 지켜가며
지금 가능한 일부터 묵묵히 실천하는 모습 큰 울림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 더퀘스트, 2025
신경과 의사였던 저자는 이상한 후각 증상으로 스스로를 진단하기 시작했고, 결국 알츠하이머병이라는 냉정한 진단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놀랍도록 담담했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운동, 식단, 수면 등 생활습관을 철저히 관리하며 뇌의 회복력—즉 인지예비능(cognitive resilience)을 쌓아왔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뇌 건강에 있어 결정적인 시기가 존재하며, 그 시기에 행한 선택들이 병의 발현을 늦추고 삶의 질을 지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꾸준한 유산소 운동이 치매 위험을 50%까지 줄인다는 사실은 의료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건강 지침서가 아닙니다. 직업적 정체성을 잃은 의사가 삶의 방향을 다시 잡아가는 과정을 통해, 상실의 한복판에서 되찾은 삶의 주도권을 이야기합니다. 두려움 앞에서도 지금 가능한 일을 해나가며 삶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저자의 모습은, 환자를 돌보는 우리의 일상에도 큰 울림을 줍니다. 치매가 두려운 이들, 노화를 준비하는 이들, 환자의 삶을 이해하려는 의료인 모두에게 이 책은 한 사람의 존엄한 삶이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감정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진심이 담긴 따뜻한 문장이 페이지마다 살아 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말과 행동은 “Let Them”
관계 갈등에서 감정소모 줄이고 스스로를 지켜내
『렛뎀 이론』 비즈니스북스, 2025
우리는 종종 타인의 시선, 감정, 평가에 지나치게 휘둘리며 살아갑니다. 더 열심히, 더 착하게, 더 많이 배려하면 인정받을 줄 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죠.
이 책은 그런 ‘감정의 과잉 대응’에서 벗어나,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렛뎀(Let Them)” — 그냥 내버려두자. 저자는 통제할 수 없는 타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 두고, 통제 가능한 ‘나의 반응’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게 두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하자.” 이 간단한 구절이 감정 소모를 줄이고 나를 보호하는 힘이 됩니다.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했을 때, 관계에서 소외감을 느낄 때, 사람들의 반응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고 자책할 때, 우리는 쉽게 에너지를 잃습니다.
하지만 렛뎀 이론은 ‘감정의 거리두기’를 통해 관계의 균형을 되찾고, 진정한 자기 삶에 집중하도록 도와줍니다. 치과진료실에서도 환자와 보호자, 직원과의 관계 속 갈등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균형의 감각을 기를 수 있는 통찰이 가득합니다. 남의 감정에 끌려가지 않고, 나의 중심을 세우는 삶. “그들이 자기 삶을 살게 두면, 내 삶은 훨씬 좋아진다.” 이 한마디에서 시작되는 심플하고도 단단한 태도가, 삶의 많은 문제를 가볍게 만들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