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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우주에서 만난 혁명: 『한글의 탄생』과 지적 인프라의 재편

배광식 칼럼

‘돌베개’에서 2022년 출판된 노마 히데키(野間秀樹) 저, 『한글의 탄생-인간에게 문자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2011년 『한글의 탄생-문자라는 기적』의 개정증보판이다. 훈민정음 창제의 배경 및 의의와 그 성장을 다룬 『한글의 탄생』은 2010년 일본에서 일어판으로 먼저 출간돼 일본 마이니치신문과 아시아조사회 주최의 제22회 아시아태평양상 대상을 받았고, 2012년 한글학회 주시경 학술상을 받았다.


노마 히데키는 일본인 부친과 한국인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고, 미술작가로 출발해, 이우환(李禹煥) 작가가 “선(線)으로부터(線より)”를 출품해 도쿄국립근대미술상을 수상한 바로 그 전시회인, 제13회 〈현대일본미술전(1977년)〉에 출품해 가작상(佳作賞)을 받은 바 있다. 1979년 한국과 일본의 젊은 미술가들의 ‘7인의 작가: 한국과 일본’이라는 교류전에 참여해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어 공부는 미술대생 때 모친이 한국 출신임을 알게 되어 독학으로 시작한 후, 한글의 매력에 빠져 1983년 30세 나이에 도쿄(東京)외국어대학 조선어학과에 입학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 교수 등을 역임하며 한국어학과 한일대조언어학 분야의 저명한 학자로 활동했으며, 1996~97년에는 서울대에서 한국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4년 ‘한국의 지(知)를 읽다’, 2024년 ‘한국의 미(美)를 읽다’, 2025년 ‘한국의 마음을 읽다’ 등, ‘한국을 읽다’ 3부작 프로젝트를 엮어내기도 했다.


『한글의 탄생』은 단순한 문자 해설서를 넘어, 한글이라는 존재가 인류 지성사에서 갖는 혁명적 의미를 철학적, 언어학적으로 고찰한 역작이다. 이 책은 한글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탄생이 인간의 ‘지(知; 앎)’와 ‘에크리튀르(écriture; 문자, 쓰여진 것, 쓰는 것, 쓰기)’에 어떤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는지 추적한다. 저자는 일본인 학자의 객관적이면서도 뜨거운 시선으로,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려온 한글이 사실은 얼마나 치열한 지적 투쟁의 산물이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저자가 제시한 가장 핵심적 문제의식은 언문불일치(言文不一致)라는 지적 부자유 상태이다. 한글 탄생 이전 동아시아는 한자라는 거대 지적 인프라에 장악되어 있었다. 입으로 말하는 ‘언어’와 손으로 쓰는 ‘문자’가 분리된 상태에서, 백성의 생생한 목소리와 구체적 감정은 한자라는 거대 격식 속에 함몰되었다.


이 지점에서 노마 히데키는 ‘문자의 역동성(力動性)’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문자는 단순히 말을 기록하는 수동적 도구를 넘어, 그 자체로 인간의 사고를 규정하고 이끄는 능동적인 생명력을 가진다. 한문이란 문자의 역동성은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로서 지식의 성벽을 쌓았고, 민중의 목소리를 ‘비문명’의 영역으로 밀어냈다. 훈민정음 창제는 바로 이 거대한 지적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찰나에 사라지는 인간의 목소리를 문자라는 시각적 형태 속에 온전히 현현(顯現)시켜 안착시키려는 인류사적 시도였다.


저자는 세종과 최만리의 대결을 사상적 전쟁으로 묘사했다. 최만리는 한자를 오랜 역사를 머금은 중화(中華)의 도를 담는 신성한 그릇이자 기득권의 상징으로 보았고, 문자가 배우기 쉬워지면 지식의 권위가 추락하고 문명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 우려했다.


반면 세종은 조선어라는 ‘독자적 실체’에 주목한 혁명가였고, 그에게 문자는 권력이 아니라 소통의 인프라며, 지식 민주화를 위한 도구며 미래를 여는 자산이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소리의 원형을 파악해 이를 시각적 기호로 치환함으로써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시켰으며, 문자에 휘둘리는 인간이 아니라, 문자를 부려 사유를 확장하는 인간의 탄생이 바로 한글의 본질이다.


세종이 언문불일치 타파를 위해 내놓은 기술적 해법은 용음합자(用音合字)의 원리다. 이는 단순히 기호의 나열이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가 가진 마디(음절)를 재현키 위해 개별 음소들을 하나의 글자 단위로 결합하는 고도의 논리적 공정이다. 세종은 소리의 최소 단위인 초, 중, 종성을 분석해내면서도, 이를 사각형 틀 안에 모아 쓰는 방식을 통해 통합적 직관을 유지했다.


노마 히데키는 용음합자를 통해 한글이 음소 문자의 과학성과 음절 문자의 가독성을 동시에 달성했다고 극찬한다. 쪼개진 소리가 다시 하나의 유기적인 마디로 합쳐지는 과정은 무형의 소리가 유형의 문자로 현현하는 경이로운 사건이다. 이러한 용음합자의 논리는 현대 전산학의 ‘캡슐화’ 개념과 유사하며, 정보의 밀도를 높여 디지털 환경에서 압도적인 인지 속도를 제공한다.


저자의 통찰은 현대 인공지능(AI) 핵심 자산인 ‘말뭉치(Corpus)’ 개념으로 연결된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시 실제 조선인의 목소리를 정밀하게 채집해 정형화된 기호로 라벨링(Labeling)했고, 이는 현대 AI를 학습시키기 위해 언어 데이터를 구조화하는 작업의 선구적 모델이다.


한글은 조음 기관 모양을 본뜬 상형과 가획의 법칙을 통해 소리와 문자를 기하학적으로 일치시켰고, 이런 구조적 완결성은 음성 인식(STT) 기술이나 생성형 AI가 데이터를 학습할 때 정교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한다. AI 입장에서 한글은 소리와 의미의 상관관계를 가장 투명하게 설명해주는 구조화된 데이터이며, 문자의 역동성이 디지털 비트 위에서 재현되는 최적의 매개체다.


노마 히데키에게 한글은 인류가 도달한 문자 지성의 정점으로, 한글 탄생은 소리가 문자가 되고, 문자가 인간의 사유를 확장하는 거대 순환의 시작이었다. 저자는 한글을 통해 문자가 지식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사고를 해방하고 타자와 연결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임을 증명했다.


우리는 한글 사용시마다 세종이 설계한 지적 혁명에 실시간으로 참여하고 있다. 『한글의 탄생』은 익숙한 문자를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그 본질에 다가가게 하며, 우리가 누리는 이 문자가 얼마나 경이로운 지적 모험의 산물인지를 깨닫게 한다. 한글은 과거 유산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사유를 짓고 미래를 설계하는 살아있는 지적 인프라다. 언문불일치의 장벽을 넘어 용음합자의 논리로 현현한 한글은, 앞으로도 문자의 역동성을 잃지 않고 인류의 지성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