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어느 순간에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없는지 모호하다는 것은, 그 변화 과정이 연속적, 무경계이기 때문입니다. 경계를 정하는 것, 분별해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은 우리 인간, 이성의 능력입니다. 당장 바닷가를 가봐도 그렇습니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서부터 ‘육지’인지, 그 경계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연속적이며 무경계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지도를 그리죠. 바다와 육지 사이의 경계를 그립니다. 인간 이성 능력 덕분에 바다는 ‘바다’가 되고 육지는 ‘육지’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분별의 힘입니다. 이성이 있기 때문에, 분별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색수상행식, 오온의 가합이라는 무상한 자아를, 전체가 아닌 ‘나’, ‘자아’로 분별하는 이성, 분별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사태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나 자신이라고 인식하는 또다른 인식의 주체가 있습니다. 누구는 ‘아트만’이라고도 하고 누구는 ‘브라흐만’라고도 하는데, 누군가는 또 이를 ‘전유기체(또는 켄타우로스), 합일의식’이라고도 했습니다. 저는 ‘확장된 자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곧 나 이외의 다른 존재, 즉 ‘타자’를 의미합니다.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 누군가는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다’라고 생각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아직 테세우스의 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계를 나누는 것, 이름을 정하는 것 - 이것은 약속, 합의의 문제 또는 권력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결국 원래의 배 조각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가 ‘그래도 그건 테세우스의 배’ 라고 여기고, 그것이 합의되거나 또는 강제되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도 그렇게 동일성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맹점이 있습니다. ‘테세우스의 배’는 하나의 유물로서 전시되고 있을 뿐이고 항해중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는 삶이라는 여정을 한순간도 멈출 수 없습니다. 항해중인 배에서 이것저것 아무거나 마음대로 갈아 끼울 수 없는 것처럼, 생명을 유지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나라는 자아는 - 그 자아라는 것이 무상한 자아라고 하더라도 - 색수상행식 모든 것을 한 번에 바꿀 수는 없는, 또는 급격하게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일 것입니다.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어느 시점에 - 아직 많은 부분 원래의 배 조각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 누군가가 ‘이제는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가 아니지, 새로운 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몇몇 구조물을 바꾼 후 ‘이제 더 이상 테세우스의 배라고 할 수 없지’ 싶을 수 있습니다. 이건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또는 약간의 성형수술 등이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어 보입니다.
돌연 더 이상 어제의 내가 아닌 것 같다는 감정과 생각이 한 사람의 인생 경로를 바꾸기도 합니다. 삶의 태도를 바꾸기도 합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분명 알려진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과 수련, 자기 개발을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 내면의 변화, 자아의 성장, 태도의 변화 등입니다. PTSD는 이와 반대되는 차원에서의 변화, 안타까운 변화일 것입니다.
약간의 성형수술 역시 비슷한 심리적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신체의 일부가 ‘심미적으로’ 바뀌면서 예전에 없던 자신감, 만족감 등으로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갖게 되는 사람이 일부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신체의 일부가 ‘어쩔 수 없이, 보다 안 좋게’ 바뀌면서 인생의 경로가 달라지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습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발생한 안모추형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꼭 좌절할 일만은 아닙니다.
10년 전, 20년 전과 생각하는 것도 달라졌고 느끼는 바도 달라졌으며 신체도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것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방금 전까지 이런 생각이 들었다가 이제와서는 또 저런 생각이 드는 그런 변덕스러운 나 자신도 계속 그것이 ‘나’라고 여기는 것은 그것을 관조하는 ‘인식의 주체’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인식의 주체가(주체들이) 동일한 자아임을 합의하고 또 강제했기 때문에, 그렇게 동일성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는 테세우스의 배가 아직 또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라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고 또 그렇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색수상행식의 가합이라는 무상한 자아를 ‘나’로 인지하는, ‘나’라는 경계로 인식하는 또 다른 인식의 주체입니다. 무상한 자아를 ‘관조하는 자아’, 무상한 자아에서 ‘창발된 자아’, 타인의 색수상행식으로까지 ‘확장된 자아’, 곧 나 이외의 다른 존재인 ‘타자’가 바로 또 다른 인식의 주체입니다. 약속, 합의가 필요하고 또는 경우에 따라 강제, 배제가 발생하기도 하는 이유가 됩니다.
언어가 정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바다’와 ‘육지’의 단어가 정해지는 것과 똑같습니다. 어디까지가 바다이고 어디서부터 육지인지 아무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바다’라는 말과 ‘육지’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까지가 ‘테세우스의 배’이고 어느 순간부터 ‘테세우스의 배’가 아닌지, 누구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역설을 품고 그 다음 - ‘그것은 테세우스의 배다’ 또는 ‘아니다’ - 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분별의 힘이고, 이성의 힘이라는게 사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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