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엑소더스를 꿈꾸는가
지난 5월 9일 오후 1시 19분. 잠자던 치과의사 R 원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후배 K 원장이었다. “형, 아직 출발 안 했어요? 오늘 설명회 있는 날이잖아요.” 아뿔싸, 늦었다. 허겁지겁 택시를 잡았다.
최근 부쩍 움츠러든 치과 운영에 대해 밤새 고민하다 새벽녘에 잠든 때문이다. 어젠 오후 내내 사랑니 발치 환자 1명뿐이었다. 함께 개원 중인 친구 A 원장과 마주치기 싫어서 일찌감치 저녁 약속을 핑계로 ‘칼 퇴근’ 했다. 아, 5년 후 내 미래는 어디쯤 있을까.
도착하니 강연은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어림잡아 300명 정도의 사람들이 강연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리 자리 잡기로 한 K 원장이 보이지 않아 그냥 서서 듣기로 했다.
“한국 치과의사들에게 호주는 가장 호의적이고 가능성 높은 이민국이 될 수 있습니다. 전문인으로서의 직업적 만족과 가족중심의 여가생활을 누리는 한편 자기계발 등에서도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연자의 말이 단숨에 귓가에 내려 꽂혔다. 딸아이 교육도 그렇고 예전부터 생각해오던 미국은 일단 어려우니까…정말 호주도 괜찮은 걸까? 내 의지로만 가능한 건가? 아니, 그보다 나는 왜 이 나라를 떠나야 하는 걸까?
■숨막히는 ‘레드오션’...희망이 안보여 18~19면
■치의 10명중 4명 “이민 가고싶다”/설문조사 20~21면■국가별 치과의사되기 23~26면■한국서 개원 안되니 이민...매우 위험 28면
■해외 기술이민 ‘조력자 역할’/글로벌지원센터 29면
■이민...꿈...넘어야 할 벽도 많다 30면
18면
숨막히는 ‘레드오션’…희망이 안보여
이민 희망 치과의사들의 이야기
2009년은 한국 치과의사들이 해외 진출에 대해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원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그 동안은 사설 대행업체나 현지의 친척 등을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뤄져 왔던 한국 치과의사들의 해외 기술이민이 올해부터는 구체적인 ‘청사진’을 갖고 공론화 됐다. 지난 5월 초 한 호주 현지 치과계 인사의 강연회에는 수백 명의 치과의사들이 운집했고 같은 달 이 같은 관심을 바탕으로 치협 글로벌지원센터가 문을 열기도 했다. 또 최근 본지가 치과의사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외 이민 관련 설문조사 결과 ‘기회가 된다면 이민을 가고 싶다’는 적극적 응답층은 36.8%로 3명의 1명꼴을 넘었다. ‘과거에 이민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다’는 응답(21.8%)을 더하면 10명 중 6명 정도가 이민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보인 것이다. 이번 취재를 위해 만난 치과의사들은 하나 같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해외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들은 왜 대한민국을 떠나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를 꿈꾸고 있을까?
#가파른 경쟁의 ‘함수’, 그리고 치과의사들
우선 해외 진출에 대한 치과의사들의 근본적인 욕구는 경쟁에 대한 피로와 현실에 대한 불안감에서 출발한다.
신규 개원 시장의 진입 장벽이 높을 뿐 아니라 기존 개원 시장이 만들어 낸 ‘레드오션’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서울에서 4년째 개원 중이라는 30대 중반의 한 개원의는 “아직 미혼이지만 호주나 뉴질랜드 지역으로의 이민을 진지하게 알아보고 있다”며 “이미 포화상태인 수도권 지역에서는 앞으로도 큰 기대를 걸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연령별 편차도 있다. 40대 이후에는 자녀 교육을 위한 선택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완전 이민 뿐 아니라 영주권 획득 후 3, 4년 정도의 단기 체류 및 취업도 포함된다.
지난달 21일 ‘호주이민클럽’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난 한 40대 후반의 남자 개원의는 “가고 싶은 곳은 뉴질랜드고 관련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는 문자를 받고 참여하게 됐다”며 “ 자녀 교육이 첫 번째 이유”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개원 중인 50대 중반 K 원장은 두 아이와 아내를 호주에 보내고 혼자 생활 중이다. 현재 K 원장은 여러 루트를 통해 이민 가능 여부를 타진하고 있었다. 투자이민의 경우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고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할 뿐 아니라 일부 사설 대행업체를 통해 피해를 본 사례도 있어 꺼려지는 상황.
K 원장은 “(치협을 통해) 정식으로 루트만 개설된다면 가장 먼저 지원할 용의가 있다. 솔직히 이제 ‘기러기 아빠’도 지긋지긋하다”며 “만약 수입이 이곳보다 좀 적다고 하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그것도 치과의사로 일할 수 있다면 최상의 선택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반면 젊은 층에서는 이민을 준비하는 과정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생각이 많았다.
공보의 Y 씨는 “일단 가고 싶은 나라의 치과의사 면허를 따두면 향후에 정말 가야할 상황이 생길 때를 대비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이를 위해 국내 전문의를 비롯한 각종 경력을 쌓아두면 더 유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즉, 그들의 입장에서는 해당국의 치과의사 면허가 보다 여유롭고 풍족한 삶을 위한 또 하나의 ‘옵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천지’로 각광받는 호주·뉴질랜드
이민 희망국가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 캐나다 등 전통적으로 이민 1순위였던 지역이 여전히 주목받는 가운데 개원 관련 규제가 까다로운 중국이나 치과계의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된 일본 등은 단독 개원의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는 추세다.
이에 반해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의 진출에는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최근 관련 강연회 및 학술집담회가 잇달아 개최되면서 진출 가능성에 대한 인식들이 크게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관련 설문조사 20·21면 참조>.
40대 후반 여성 개원의 A 원장은 “원래 가고 싶은 곳은 미국이지만 이민 문턱이 생각보다 높아 호주 또는 뉴질랜드를 차선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고 40대의 K 원장 역시 “집담회 등을 통해 호주를 알게 됐다. 미국이 (쿼터가) 막혀 호주를 고려하게 됐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최근 호주나 뉴질랜드가 미국, 캐나다 등을 잇는 새 이민대상국으로 각광받고 있는 것은 천혜의 자연조건과 우수한 교육 시스템, 그리고 여유로운 삶으로 대변되는 매력적인 조건이 우선 부각됐기 때문이다.
물론 치과의사가 ‘절대부족 직종(Critical Skills List)’으로 선정될 만큼 호주 정부가 해외 이민자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익명의 그들, 왜 망설이는가?
그러나 현재 이민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나 한국 치과계의 현실에 대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인터뷰를 위한 개별 접촉에서는 한결같이 익명을 요구했으며 내용이 크게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벌써 수년째 이민을 고민해 오고 있다는 K 원장은 “물론 해외 진출을 통해 한국 치과의사의 우수한 임상 수준을 알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만 잘 살자고 (해외로)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밝혔다.
한 이민준비 모임에서 만난 또 다른 개원의 K 원장 역시 “확실히 국가적인 측면에서는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0.1% 상위권 내에 드는 사람들이 치과대학을 졸업해서 이민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자신이 무한경쟁에서 뒤처지는 것 같아 민망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역시 익명의 한 개원의는 “말이 좋아 해외 진출이지만 극심한 경쟁에서 밀려 떠난다고 볼 수 도 있는 것 아니냐”며 “정보를 찾아 강연회나 집담회 등을 찾아가고 온라인 사이트에서 정보를 모으고 있지만 친구나 선·후배 등이 이를 알게 될 까봐 은근히 꺼리는 것도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같은 해외 진출 움직임들이 공론화될 경우 ‘이민 경쟁’이 보다 심해질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메일을 통해 이민 시험절차 등을 질의해 온 한 개원의는 “어차피 이것도 경쟁으로 봐야한다”며 “지금은 호주나 뉴질랜드의 쿼터가 열려 있다고 하지만 정보를 입수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린다면 해당국에서도 이를 재고할 수 있지 않겠는가. 당장 내년부터는 영어시험의 통과방식이 재조정되는 등 수시로 제도가 변하고 있어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밝혔다.
무조건적인 ‘낙관론’을 경계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실제로 준비해보니 생각보다 힘들고 알면 알수록 인종차별이나 언어의 벽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치과의사 본인과는 별도로 아이나 부인 등 가족들의 현지 적응 역시 중요한 문제라는 조언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또 최근에는 개원 시장이 포화상태인 일부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임상경력이 부족한 경우 취업이 잘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는 전언이다.
반면 치과의사가 태부족한 도서나 외곽지역의 경우 문화시설이 부족하거나 도심지역과의 거리가 멀어 생활이 불편한 것은 물론 적응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많아 무분별한 ‘장밋빛 전망’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