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더위가 한창인 얼마 전에 국내 최고 교향악단의 연주회에 가게 되었다. 일찍 도착하여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마침 다른 건물에서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귀한 미술전시회도 열리고 있어 오랜만에 눈을 호강시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전시회장으로 가는 도중에 막바지 준비가 한창인 야외무대가 보였는데 스태프들의 분주한 모습을 보니 공연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광복절을 기념하여 열리는 무료 음악회였다.
육군 군악대의 연주와 성악가, 탈북 청소년들로 구성된 아코디언 연주 팀 등이 출연하는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아울러 그 주변엔 먹을거리 장터가 열려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다양한 스낵 코너와 국내외 유명 맥주, 외국인 셰프들도 눈에 띄었다. 나도 유럽식 핫도그와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맛보며 장터거리를 즐겼다. 장터 풍경을 보며 새삼스레 13년쯤 전 미국에서 지내던 때가 생각났다.
L.A.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근교의 한적한 작은 도시에서 생활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마을에서 발행하는 신문을 읽다가 음악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국땅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던 차에 머리도 식힐 겸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과연 어떤 음악회일까 하는 약간의 설레임을 안고 찾아갔다. 우리 가족이 도착한 곳은 클랙커미스카운티(Clackamas County)에 있는 레드랜드 볼(Redland Bowl)이었다. 동네 크기처럼 규모가 매우 아담하고 예쁘게 생긴 상설 야외음악당으로, 매우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세워진 때는 기억나지 않지만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이 이곳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역사가 오래되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는 듯했다.
주변의 잔디밭에서는 가족끼리 간식과 음료수를 마시며 즐기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날 공연은 동네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였다. 연주 시작 전에 국민의례로 사회자가 즉흥적으로 불러낸 10~12명의 초등학생들의 선창으로 미국 국가를 제창하였다. 그 자리에 있는 주민들 모두가 국가를 부르는 모습이 매우 진지해 보였다.
우리 뒷자리에 앉은 중년의 흑인 여성은 ‘러브 콘체르토(A lover’s concerto)’로 잘 알려진 가수 ‘사라 본(Sarah Voughan)’ 정도의 성량을 뽐내며 어마어마한 몸집과 함께 우리를 놀라게 했다. 곧 시작된 연주는 사실 그리 썩 훌륭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자세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과 다르지 않았다. 중간에 곱지 못한 소리도 나고, 다소 실수도 있었으나 그것 또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교하게 훈련된 교향악단과는 분명 큰 차이가 있었으나 연주가 끝나고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는 차이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주민들로 구성되었으며,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양한 연령층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 가운데는 학생, 교사, 주부, 점원, 농부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웃이 관객이고 연주자였으니 마을의 주민이 하나로 뭉친 것이다. 이런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 깊고 부러웠다.
우리의 현실은 아마추어의 연주나 공연은 비교적 호응도 적으며 무시당하기 일쑤다.
대학가의 축제에도 비싼 출연료를 지불하면서까지 인기 있는 유명 연예인들을 부르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 마음이 씁쓸하다.
그 당시엔 여름내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의 공연이 펼쳐졌는데 매번 다른 내용이었다.
성악, 마임 공연, 발레, 인근 공군 부대 군악대의 연주, 합창단,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예술을 볼 수 있도록 진행했다.
한 가지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발레 공연에 갔던 일이다. 출연진에 대해 미리 알지 못하고 갔는데, 공연이 시작되고 보니 출연자들의 얼굴이 너무 낯이 익었다.
한국 사람과 너무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냐고 집사람과 얘기를 나누던 중 주인공이 나오는 순간 우리나라의 ‘유니버셜 발레단’임을 알았다. 외국의 이 작은 동네에서 우리나라 발레단의 공연을 보게 되어 매우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한편 이곳 관계자들의 섭외력에 놀랐고, 우리나라의 발레 수준에 또 한 번 놀랐다. 가까운 곳에서 어렵지 않게 예술을 접하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그들이 부럽기도 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마을 단위로 이런 공연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도 지자체가 실시되어 지역마다 많은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주민들의 관심과 협조가 매우 중요할 것이다. 레드랜드 볼에서 공연이 끝나고 나면 자원봉사 할아버지께서 잠자리채를 들고 다니면서 모금을 한다.
작은 후원금이라도 기꺼이 넣으며 자신이 앉아 있던 벤치, 잔디밭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떠나는 주민들의 모습은 성숙한 시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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