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장님, 지난 번 치과 때보다 좀 세진 것 같애~” 치료를 받으시던 환자분께서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내셨다. 나는 확장 이전을 한 번 하였고, 이전 후 10년째 진료를 하고 있다. 지난 번 치과는 최초 개원지를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때의 진료는 10년은 지난 시절의 이야기이다. 챠트를 확인해보니 최초 개원지 시절부터 나에게 진료를 받아오신 환자분이셨다. 좀 세졌다는 말씀은 내 손의 움직임과 터치, 환자를 대하는 모습이 10년 전보다 거칠어졌다는 이야기셨다. 늘 같은 마음으로 진료해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손이 거칠다고 느끼신 이유가 무엇일까. 나의 교만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마음가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10년 전의 나. 아마도 그 때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환자분께 더 진심이었던 것 같다. 임상가로서 한창 성장하고 있던 때였고 매 케이스 즐거웠다. 경영보다 임상에 열심이었다. 최초 개원지가 마케팅이 통하지 않는 지역이어서,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진정한 입소문뿐이었으므로 내 앞에 있는 환자에 최선을 다하는 게 매일 매일의 일상이었다. 임상 23년차, 보철, 교정, 턱관절 치료를 포함한 모든 진료에 있어 원숙하고, 대부분의 영역에서 성장세가 꺾이는
첫 개원을 하던 날, 제가 최우선 목표로 했던 것은 대단한 임상도, 물질적인 성공도 아니었습니다. 한 자리에서 20, 30년 동안 꾸준히 치과를 할 수 있다면 다른 목표들은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개원을 하던 날, 저의 목표는 한 자리에서 20, 30년 치과하기였습니다. 개원한 지는 20년이 조금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 자리에서 10년이라도 해 보았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첫 개원지가 재건축되는 바람에 10년을 못 채우고 이전하였습니다. 지금의 개원지에서도 아직 10년을 채우지 못 했습니다. 한 자리에서 20, 30년은커녕 10년도 못 채워보고 제가 목표로 했던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습니다. 사실, 한 자리건 아니건 20, 30년 동안 개원 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든 꾸준히 20, 30년 동안 해낸다는 것은 끈기와 인내심 등 삶에서 매우 중요시되는 태도를 요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치과를 20, 30년 하는 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20, 30년 동안 개원 생활을 유지하려면 우선 건강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해야 자신감 있게 진료할 수 있습니다. 건강을 잃는 순
쟝 블랑제리는 이수역에 지점을 둔 유명한 빵집이다. 그냥 유명한 빵집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유명한 빵집이다. 유명 백화점에도 입점해있다. 팥 빵 하나만 먹어봐도 그 빵집의 진가를 알 수 있다. 일단, 빵이 무척 묵직하다. 뭘 넣었는지, 손바닥에 전해지는 중량감에 사장님께서 재료를 아끼지 않았음을 대번에 알게 된다. 적당히 달달한 팥이 빵 속 가득히 들어앉아 내 앞니의 커팅에 속절없이 잘린다. 찰진 빵의 식감은 대구치의 주름에서 뇌의 주름으로 직행하는 듯하다. 사실, 쟝 블랑제리의 사장님은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이 아실만한 유명한 치과의사의 동생분이시다. 내가 쟝 블랑제리를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재료학 강의 시간 중이었다. 당시 강의에 들어오셨던 치과의사분께서 쟝 블랑제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리고 그 치과의사분께서 유명해지셨다. 쟝 블랑제리는 낙성대에 있는 빵집이었다. 빵이 맛있기로 입소문이 자자하였고 특히 서울대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 낙성대에 있는 빵집의 봉투가 혜화의 서울대병원에서도 종종 발견되었다고 한다. 치과의사인 형의 존재가 쟝 블랑제리의 성장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쟝 블랑제리의 빵들은 화려하지 않다.
2022년 한 통계에 의하면 치과의사의 평균 수명이 72세라고 한다. 일반인보다 1.8년 짧은 수치라고 한다. 사망 원인으로는 암이 가장 많았고, 심혈관 질환과 사고사, 자살이 뒤를 이었다고 한다. 내가 40대 중반을 조금 넘었는데… 내가 치과의사 평균 수명까지 산다고 생각해보면 25년 정도 살 수 있는 것 같다. 건강하게 사는 연한, 건강수명은 겨우 20년 남짓 남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0년은 사람이 태어나서 자라 갓 성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다. 20년은 내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임상을 해온 연한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정말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 정도일 가능성이 높다니... 짧은 생각들이 이어졌다. 노년에 대한 공감이 새로웠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라는, 노년 환자들의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그것은 남은 삶이 짧다는 것에 대한 불평, 푸념이 아니다. 진정, 짧은, 남은 삶에 대한 자각의 표현이다. 평균 수명을 넘기신 환자분의 경우에는 자신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나름의 계산으로 추정한 여생이 5년이라면, 3년이라면, 또는 1년이라면… 치과 치료에
나의 유년기 어느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치과에 들어섰다. 치과 원장님과 같은 교회에 다니시는 아버지는 원장님을 보자마자 원장님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원장님은 아버지와의 짧은 인사 후에 나를 진찰하셨다. 내 입 안에는 우식이 많았다. 원장님은 하악 대구치 네 개에 아말감을, 상악 대구치와 소구치에는 실런트를 하셨다. 치료 비용은 건강 보험 덕분에 저렴했다. 그 때의 수복물들은 지금까지 건재하다. 그 때는 다들 생활이 어려웠다. 교정 장치는 부끄러워 숨길 물건이 아니라 자랑할 만한 부의 상징이었다. 건강보험으로 보장되지 않는 치과 치료는 서민들에게는 많이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건강보험은 대부분의 국민이 가난 시절, 서민들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 지금,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다니고, 내돈내산 후기라는 말이 유행하는 지금, 건강보험이 변함없이 온 국민이 건강하게 사는 데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시점이 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건강보험 재정이 건전하지 않다는 말은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고, 의사분들 사이에서는 건강보험 재정이 고갈되어 의료민영화의 시대가
“저 최선을 다할게요. 선생님도 힘을 내주세요.” 치료받기 직전에 체어에 누운 채로 환자가 한 말이다. “너무 멋진 말이네요. 힘이 납니다.” 대답을 하고 치료를 시작하였다. 22년차 치과의사에게 환자의 의욕은 정말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저년차일 때에는 젊음과 패기로 식어가는 환자도 데워서 볼 수 있었지만 열정을 되찾기 위해 때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동기부여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야 하는 고년차 치과의사에게, 차갑게 식은 환자를 마주하는 일은 참 난감한 일인 것 같다. 병원에서의 유대관계는 치유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다.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의료진 간의 관계가 동맹의 관계가 되는 일은 대화가 선순환되도록 하기 위해, 치료행위가 무탈하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조금 어렵더라도 의료진은 그 일을 해내야 한다. 선순환적 관계 형성, 치료의 성공을 반복하여 환자군 전체를 정화시켜 나가는 것이 원장이 해야 할 일이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좋은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 분위기부터가 관계에 있어서는 차갑게 식은 상태이다. 학교, 회사, 가게 등 모든 공간에서 인간관계라는 것은 예전보다 차가운 것이 되었다. 병원도 그 흐
구반포는 저의 첫 개원지입니다. 구반포는 전체가 주공아파트 단지였습니다. 참 오래된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저는 아파트 상가 건물에 치과를 차렸는데 제가 치과를 열었을 때 건물의 나이가 이미 30살이 넘은 상태였습니다. 지금의 구반포는 재건축에 들어가, 제가 세 들어 있던 건물은 다 허물어졌고 새 아파트 건축 공사가 한창입니다. 치과를 운영하면서 구반포의 특별한 면모를 몇 가지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멈춘 듯한 옛날 동네, 오래된 동네답게 주민들 간에 유대감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지식 수준이 높았습니다. 건강을 위한 지출에 인색하지 않은 분들이 많았습니다. 복날이 되면 삼계탕 가게에서 열 개도 넘게 파라솔을 늘어놓고 삼계탕을 팔았습니다. 복날만큼은 아파트 단지 내 주차장에 파라솔을 설치해도 민원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삼계탕을 파는 분도, 삼계탕을 드시는 분도 아무렇지 않았고, 동네 자체가 그 상황을 즐기는 듯 했습니다. 제가 그 동네에 들어가서 9년 동안 치과를 했는데 매년 그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동네 잔치 같은 그 모습이 시작된 때는, 민원 같은 것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카센터 사장님은 아파
원장실 컴퓨터에 2025년 폴더를 만들었습니다. 2025년 동안에 쓸 이런 저런 자료들, 서류들이 담길 것입니다. 한 해가 갔다는 뜻입니다. 2008년 폴더부터 2025년 폴더까지 한 줄로 나열된 것을 봅니다. 개원 참 오래 열심히 했습니다. 2024년 어느 날, 우리 치과가 양심 치과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출처는 어느 분의 인터넷 카페였습니다. 근거가 확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저를 양심적이라고 생각한다는 뜻이어서 가만히 저의 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제가 진료를 하면서 양심을 의식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그 동안 제가 어떻게든 양심적이었나 봅니다. 2024년, 저는 사랑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불필요한 치료는 권하지도 시행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능력 밖의 일은 정중히 사양하였습니다. 환자도 저도 쓸데없이 고생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대로 사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힘들고 아프다는 호소를 받아주었습니다. 오해나 억측도 받아주었습니다. 정당성과 양심에 대한 요구도 들어주었습니다. 제가 치과의사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은 가장 큰 성장은 제 내면의 부정적인 감정이 찰랑거릴 때, 제 심연의 상처와 쓴 뿌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잘 해둬라. 나중에 커서 당신이 말 한 번 걸기조차 어려울 정도의 미인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다.’ 어느 외국 서적에서 보았던 글귀이다. 매우 점잖고 긍정적인 문체의 책이었다. 진취적이고 밝은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그런 책 속에 있던 재미있는 문장이어서 더 기억에 남은 것 같다. 영화 배우, 모델 같은 여자들에게도 어린 시절은 있었을 테고, 그 시절에 조금 잘 해줬던 사람을 기억하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인 것 같다. 흰 머리가 수북한 지금, 내가 우리 직원들한테나 말을 걸지, 감히 어떤 여자에게 가서 말을 걸겠는가. 미인에게는 말을 걸 일이 없기도 하다. 그런데 어린 시절에 나에게 교정 치료를 받은 여자 아이가 미인이 되어 치과에 찾아온 일이 있었다. 일반 진료 환자의 이름은 기억 못 하는 경우가 있지만, 교정 환자의 이름과 얼굴은 매치를 잘 하는 편이다. 이름을 보고, 얼굴을 보았는데 매치가 안 되었다. 이름과 얼굴을 한참 번갈아 본 후에야 내가 교정치료를 해 준 여자 환자였던 것이 인지되었다. 아이였을 때 돌출입을 주소로 내원한 여자 환자였는데 대학원생이 되어서 이전 개원한 나를 찾아왔다. 반가움과 보람, 기쁨 등 여러 가지 긍정적
의사가 병원 밖, 환자가 있는 곳에 가서 진료하는 것을 왕진이라고 하죠. 의사와 간호사가 집에서 요양하고 있는 고령의 환자를 찾아가 진료를 하는 것이 왕진의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 진료 장비가 없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되는 치과의사에게 있어 왕진이라는 것은 좀 먼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왕진의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40대 남자, 전신적으로 건강하신 환자분이었습니다. 치주적으로 다소 병적인 부분이 있어 치주소파술을 하고 귀가하시게 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요. 환자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입에서 피가 나고 있는데 집에서 넘어진 탓에 허리를 다쳐 치과에 갈 수 없다며 도와달라고 하셨습니다. 집에 계신 분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나 생각하다가 이동식 석션이 치과에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개원 초였고 환자가 워낙 없던 때라 예약도 없었습니다. 이동식 석션을 가지고 직원 한 명을 대동하여 환자분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치과를 끼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 환자분의 집이 있었기 때문에 차를 운전하여 금방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분께서 허리를 부여잡고 계셨고, 입술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동식 석션과 거즈 등을 이용
“이거 하나만 시켜도 되나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가격이 저렴한 에피타이저 중의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잘 몰랐던, 대학 시절의 제가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마음에 정한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사장님 앞에서, 에피타이저만 시켜도 되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자유로워 보이는, 조금 긴 머리에 백발이 섞인, 예술적 감성과 철학적 지성을 겸비해 보이는 사장님은 당연히 그래도 된다며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여주셨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고급진 분위기의 레스토랑에서 깔끔하게 정돈된 자리를 한 시간 넘게 차지하고 있을 것인데 에피타이저만 시켜도 될 리가 없었죠. 아마도, 당시의 저에게는 그런 암묵적인 룰에 대한 감각이 매우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본 일정 중에는 에피타이저와 메인을 적당히 시켜서 구색을 잘 맞추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도, 사장님의 편안한 리드 덕분에 암묵적인 룰을 떠나 자리에 맞는 식사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장님의 온화한 미소가 그냥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저는 지금도 가족들을 데리고 서래마을 톰볼라에 가서 그 미소를 떠올리면서 머릿수보다 더 많은 요리를 시켜서 식사를 하곤 합니다. 가끔
저는 첫 개원부터 지금까지 야간진료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야간진료가 필요할 만큼 환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야간진료 시간이 아니면 내원하기 어려운 환자분들이 계셔서 진료팀 절반을 퇴근시키고, 남은 인원과 함께 야간 진료에 임하고 있습니다. 2008년, 개원 초년차 시절, 두 명의 치과위생사를 고용해서 치과를 운영했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그 당시에는 치과들이 대부분 주6일 근무제를 적용했습니다. 치과위생사를 한 명만 고용하든, 두 명을 고용하든, 세 명을 고용하든 주6일 모든 날 동안 인원의 증감 없이 꾸준히 함께 일할 수가 있었습니다. 평일 진료 시간을 아침 9시반부터 저녁 7시로, 야간진료는 저녁 9시까지로 세팅했었는데 군말 없이 늦게까지 기다리다 퇴근했던 치과위생사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야간진료 시간이 되면 창 밖으로 보이는 저녁 풍경의 운치, 낮 동안의 열기가 식어진 진료실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체어 세 개만으로 개원했던, 첫 개원지의 추억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환자도 많지 않고 어시스트 할 직원도 많지 않으니 낮의 진료보다 더 꼼꼼하게 진료가 이루어집니다. 평소에는 직원에게 넘기던 일도 제가 마무리를 하곤 합니다. 그렇게 야간진료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