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일부터 5월 6일까지 안중근 의사의 자취를 찾아서 중국 여행을 하게 되었다. 대학원 지도교수님 이셨던 김영수 교수님과 그 문하생 5명은 안중근 아카데미 수강생들의 현장답사 일정에 합류하였다. ‘안중근 아카데미’는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과 평화사상을 주제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이다. 약 15주간의 강의와 국외 안중근 의사 사적지 답사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답사여행에 우리가 합류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오전 하얼빈역 대합실 안에 있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열차가 오기를 기다렸고, 열차가 도착하여 오전 9시 30분경 이토 히로부미가 안의사 앞을 2, 3보 지나갔을 때쯤 이토 히로부미의 오른쪽 몸통을 향하여 권총을 발사, 그중 3발을 명중시켜 사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던 것이다.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항일투쟁사에서 최초로 발생한 중대한 사건이며 이후에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정상 이유로 하얼빈에서 안의사 거사 이후 행적 순서대로의 답사가 아니라 역방향 순서대로 여순에서부터 답
지금의 내 나이보다 젊으셨던 40대 중반에 선친께서는 틀니를 끼기 시작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서랍 속에서 뒹구는 헌 틀니는 낯설지 않았다. 비록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지만, 신기한 장난감이었다. 때로는 뜨거운 찌개를 후루룩 드시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틀니 끼신 아버지가 부럽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치과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고, 가끔 틀니를 꺼내 들고 주머니칼로 내면을 조정하시거나 먹지를 입에 물고 교합조정을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자주 본 나로서는 의치를 전공하게 된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레지던트 1년 차, 처음 배정받은 틀니 환자는 나에겐 굴욕이었다. 본 뜨는 인상채득 과정이 과연 잘 된 것인지 알 수 없고 그 결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던 당시로는, 스텝마다 선배님의 지도를 받아가며 치료를 진행했다. 다행히 결과는 만족스러웠지만, 환자는 수납 창구에서 ‘나를 치료한 의사가 틀니를 처음 하는 게 분명하다. 나는 실습 대상이었기 때문에 치료비를 반만 내겠다’고 소란을 피웠고 나는 과장님께 불려가 꾸중을 듣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조금 손놀림이 익숙해질 무렵, 아버지의 틀니를 처음부터 끝까지 내 손으로 해드릴 수 있었다. 대견해 하
지난 4월 12일 서울대치의학 대학원 명예교수 간담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작년말 본부 감사에서 본교에 박물관과 기록관이 있는데 “치의학 박물관”이 있어야 하는가? 교육연구 재단에서 운영비를 지급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는데… 대학원에서는 1922년 “경성치의학교”로 개교한 이래 5년후 100주년을 앞두고 준비사업을 하고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치과의사학 전임교수나 교실이 없다는 것과 미국서 매릴랜드 치의학 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서울대 치대 요람에는 “치의학 박물관((Museum of Dentistry)은 일본인에 의해 서양치과 의학을 우리나라에 소개하기 시작한 이후를 중심으로 각종 치과관련 의료기기, 약품, 문서, 서적 등 1,500여종, 총 6,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초의 치의학 박물관으로 우리나라의 근대 치의학의 발달과정, 각종 치과용 기구의 변화, 그리고 서울대 치대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의 수집과 보관 및 전시에 주목적이 있다. 치의학 관련 유물을 수집하고 전시하여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동시에 후학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치의학의 역사를 보존하는 자료 보존소의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터키 이스탄불을 여행한 해가 2013년이었으니 어언 4년이 흘렀습니다. 그때의 느낀점을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기술하고 싶기에 글을 쓰지만 어디까지나 저의 기억에 의지한 여행후 후기이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스탄불은 동로마의 수도였습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로마가 아닌 새로운 수도로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하고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의 수도가 되어 나중에 이슬람 세력이 융성한 1453년 5월 29일에 슐탄 마흐메드2세에 의해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오스만제국이 서게 됩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이러한 이유로 이스탄불은 화려했던 기독교 세상의 문명과 그 이후를 지배했던 이슬람 세상의 문명이 공존하는 매력을 지닌 땅입니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를 동시에 담고 있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스탄불을 대표하는 건물이 또 묘하게도 기독교 문명의 정수인 소피아성당(아야 소피아)과 이슬람 문명의 정수인 블루모스크가 한 언덕위에서 위풍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피아 성당이 180도 돌아 뒤를 돌아보면 블루모스크가 서로를 노려볼 듯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어떤 관광지에 저 둘 중 한 건물만 서 있
모처럼 맞은 휴가다. 어느 곳으로 갈까. 강원도나 경상도는 산이 높아서 계곡이 깊고 기암괴석 어우러진 골짜기의 물소리가 좋다. 충청도나 전라도는 평야가 넓어 시야에 다가서고 지나치는 풍경이 언제나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넓은 대지와 뜨거운 태양에 익어가는 곡식을 보면 나의 삶의 어느 한 순간을 전원에서 보내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한다. 어쨌든 계곡을 원하는 아내를 설득하여 남도여행을 하기로 했다. 차는 물과 야트막한 산을 지나고 이따금 보이는 갯벌과 흙빛 바닷물 출렁이는 서해안을 끼고 돈다. 충정도 경계를 지나니 붉은 꽃을 피운 키가 나지막한 가로수가 나의 시선을 끈다. 봄철의 가로를 밝히는 꽃이 벚꽃이라면 남도의 여름 가로수는 배롱나무라 할 정도로 많이 심고 가꾸어져 있다. 배롱나무는 자라서 나이를 먹게 되면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면서 매끄럽게 되는데 껍질을 벗듯 세속의 때를 벗는다는 의미를 가져서 예전부터 주로 서원이나 절들에 심어졌다고 한다. 요즘은 대량 재배하여 고속도로나 국도의 가로수로 흔하게 볼 수 있다. 붉은 꽃, 흰 꽃, 옅은 분홍을 한 꽃들이 있는데 봄철 단시간에 피어 한꺼번에 지는 벚꽃 보다는 여름 한철 피고 지는 기간이 100일 동안
진료를 한 시간만 빨리 끝내고 어떤 일정을 진행한다 해도 벌컥 화를 내며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원장이 있는가 하면 며칠을 통째로 비우는 일정을 흔쾌하게 수락하는 원장도 있습니다. 진료와 경영을 책임져야하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이어서 그러겠지만 평생 환자를 봐야 한다면 그 평생이란 긴 시간에서 며칠이란 작은 시간을 할애하여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 같습니다. 감기에 걸려도 약을 먹지 않고 한숨 푹 자고 나면 쉽게 낫곤 했는데 작년에 일정을 마치고 한 달을 죽어라고 아팠습니다. 열이 나고 몸살이 심해서 그 좋은 계절 5월에 나들이 한번 못하고 진료가 끝나면 바로 집에 와 몸져누워 끙끙됐던 아픈 기억이 있어 올해는 운동도 하고 홍삼도 먹어가며 체력 단련을 했습니다. 또다시 여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진료 준비를 마치고 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출발하였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모두의 안전과 그리고 저에게 겸손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이 겸손하지 못하고 자기를 내세우면 상대는 큰 상처를 받습니다. 진료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의료진은 절대 갑이 되기 때문에 특히나 몸을 낮추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행여나 선교를 빙자한 의료 행
나는 평소에 시간약속을 약간 병적일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주위사람들로부터도 “융통성 있게 살아야지 그렇게 깐깐하게 생활하면 피곤해진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 애기를 듣게 되면 내가 너무 좀 심한가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치과개원을 하고 1년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다. 대기실 벽의 페인트가 몇 군데 갈라져있는 게 보였다. 개원당시 공사할 때 인테리어 업체와 2년간 무상A/S받기로 계약되었기에 업체에 연락을 하여 인테리어 담당실장과 토요일 2시에 벽면 수리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날이 되어 오전진료를 하고 있는데 담당실장으로부터 약속시간을 1시 반으로 당길 수 없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토요일 진료가 1시까지라서 문제될 것이 없겠기에 그러자고 하고는 진료를 마치고 인테리어 업체를 기다렸다. 그런데 약속한 1시 반이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약속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흥분지수가 조금씩 오르기 시작하였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동안 들었던 주변의 충고도 있고 해서 전화하여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욕구를 꾹 누르고는, 원래 약속시간이 2시였으니 2시까지는 기다려보자는 마음을 먹고 기다렸다. 하지만 2시 10분이 지나
힘들고 지치던 원내생 생활과 국가고시 공부를 마치고, 벚꽃이 피는 동안 훈련을 받고 나니 나는 공중보건의가 되어 있었다. 공중보건의가 되고 처음 느낀 감정은 바로 당혹스러움이었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공무원 신분이 되자마자, 나와는 달리 공직생활에 익숙한 직원들과 섞여서 생활하는 것. 그것이 나를 우선적으로 당황스럽게 했다. 내게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고, 내게 어색한 것이 당연할 때, 법칙과 규율을 따라 습관을 바꾸며 생활하는 것이 가면을 쓴 것 같았고, 훈련소 생활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치과의사로서의 역할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지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던 나를 믿고 찾아오는 환자들을 한 명의 치과의사로서 대하는 것은 아주 긴장되는 일이었다. 특히나 원인을 파악하기 힘든 통증을 주소로 내원하는 환자들, 그분들이 아픈 이유를 알려달라며 나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치과의사로서 가진 지식이 보잘것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다. 당혹스러움이 차차 가시자 두 번째로 다가온 감정은 막막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뒤. 2020년 소집 해제될 때까지의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버리는 시간, 흘려보내는 시간으로
얼마 전 즐겨보는 예능프로그램에서 개그맨 김수용씨가 외국공항에서 있었던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공항장애’라는 표현이 우스갯소리로 나왔던 것을 보았다. 이 방송을 보고 문득 예전에 내가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2006년 본과 2학년 겨울 방학 때 외국 치과대학과 교환학생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캐나다 UBC 치과대학을 4박 5일 일정으로 방문한 적이 있었다. 교수님 두 분과 나를 포함한 동기 5~6명이 함께 가게 되었는데 개인적으로 첫 해외여행이라는 설렘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평소 영어울렁증이 심한편이라 두려운 마음도 가진 채 비행기에 올랐다. 10시간이 넘는 긴 시간의 비행 후 벤쿠버 공항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입국심사였다. 당시 나는 장시간의 비행으로 떡진 머리를 감추고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캐나다 여행기간 동안 애용할 컵라면으로 가득 찬 빨간 비닐 봉다리를 들고 입국심사라인에서 내 차례만 오기를 설렘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내 차례. 푸른 눈의 입국심사관이 나에게 빠른 말투로 뭐라고 솰라솰라하고 정신없이 말하는데 감으로 캐나다에 온 목적이 뭐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다른 일행들은 교환학생으로 온 거라고 대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가리는 것 없이 잘 먹었던 나는 과식 때문에 체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내 배가 아플 때마다 항상 어머니는 단조로운 멜로디의 “엄마 손은 약손, 우리 아들 배는 똥배”라는 노래를 부르시며 아픈 내 배를 어루만져 주셨다. 어머니의 손이 배에 닿으면 거짓말처럼 배 아픔이 사라지고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잠들 수 있었다. 어릴 적 내 배를 어루만져 주시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은 정말 배를 낫게 하는 힘이 있었고 나는 그렇게 믿고 유년기를 보냈다. 중, 고등학교를 들어가자 나에게도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사춘기가 찾아왔다. 부모님보다는 친구들이 좋던 그 시절, 나는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오가며 공부하던 학창시절에는 배가 아플 때마다 어머니의 손을 찾기보다 집안 상비약통에 들어있던 소화제를 찾아먹거나, 학교 보건실에서 소화제를 구해먹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은 흥겨운 멜로디와 함께 어릴 적 추억으로 잊혀져가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서울 집에서 떨어진 전주로 대학에 입학해 엄마의 따뜻한 손길과는 더욱 멀어진 삶을 살게 되었다. “엄마 손은
어느덧 인생의 초가을쯤, 마흔을 훌쩍 넘겨버린 나. 화사한 봄 햇살같이 나에게도 봄이라 불릴만한 시기가 있었다. 사촌들까지 오빠만 9명인 딸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많은 친척들과 가족들에게 사랑을 받고 자라며 부러울 것 없이 유년시절을 보내온 나는 어릴 적 엄마, 아빠가 만들어 주셨던 김밥이 그리도 맛있었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갈라치면 왜 꼭 비가 왔을까. 소풍 때면 아빠와 엄마는 새벽부터 뽀얀 흰 쌀밥을 고슬고슬하게 지어 코끝을 자극하는 고소한 참기름과 씹을 때마다 톡톡 터지는 깨소금을 듬뿍 넣고 약간의 소금으로 간을 하고 맛있게 비벼내셨다. 까만 김 위에 양념한 밥 한 덩이를 척 얹어 두툼하게 썬 단무지, 소시지, 달걀, 오이. 사실 오이 때문에 엄마와 아빠는 가끔 다투셨다. 엄마는 시금치가 쉬면 탈난다고 오이를 넣자고 주장하셨고, 아빠는 맛이 떨어지니까 그래도 시금치를 고집하셨다. 아마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이 탈나는 게, 맛없게 김밥을 먹는 게 싫었던 두 분의 다르지만, 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 시절에 귀했던 쇠고기는 미리 정육점에서 김밥에 넣기 좋게 썰어서 준비를 하셨다. 그 시절에는 게맛살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우엉을 넣어주신 적도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