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포털 사이트에서 찾은 처서(處暑)의 사전적 의미. 여름이 지나면 더위도 가시고 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 즉, 더위가 그친다는 뜻. 연일 일기예보에서는 입추다, 처서다 하면서 이내 가을이 올 것처럼 얘기하지만 지금과 같은 더위라면 12월에도 반팔을 입고 다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좀 오바인가? 일기예보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불볕더위’, ‘가마솥 더위’, ‘기상관측 사상 최고의 무더위’, ‘한반도 불가마’. 올 여름 살인적 더위를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더위를 표현한 최상급 단어들이 부끄럽지 않다. 피해 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예전엔 가끔 태풍도 와서 그럭저럭 더위를 좀 날려 주곤 했는데, 올해는 한반도 주위를 감싸고 있는 무더운 기단에 막혀 태풍이 접근을 못하고 있다니 역대급 더위이긴 한가 보다. 오늘도 낮 최고 기온 36도. 지열 때문에 체감 온도는 거의 40도 육박. 점심 먹으러 잠깐 나온 지 5분 만에 머리에 송글송글 땀이 찬다. 점심 메뉴보다 빨리 더위를 피해 어디든 들어가고 싶은 생각뿐. 잠시 땡볕을 걸으면서 올해만큼 가을을 기다린 적이 있나 싶어 지나간 과거 여름들을 생각해 본다. 대략 여름 휴가가 지나면 선선한 바람
중고등학교 시절 수학 문제 한문제를 풀 때마다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왠지 모를 기쁨이 있었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은 공부는 하지 않고 축구나 농구 등의 운동을 열심히 했다. 그때는 그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운동이 주는 즐거움을 알지 못했다. 대학교, 대학원을 거치면서 수많은 학문이 주는 즐거움을 느꼈다. 어떤 때는 연구에 막혀서 좌절도 하고 어떤 때는 연구의 돌파구를 찾아서 기뻐도 하면서 인생의 즐거움은 오직 무언가를 배우고 연구할 때만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내가 입학할 대학교는 수영이 필수 과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영장에 가서 강습을 받았다. 물을 두려워했던 나는 강습받던 첫날 강습후 샤워장에서 쓰러져 “이 힘든 것을 돈 내면서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한참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학교 필수 과목이라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1달동안 열심히 다녀서 자유형은 어느 정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힘든 것은 변함이 없어서 1달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영장을 박차고 나갔다. 그래서 대학교 필수 과목은 그럭저럭 잘 넘겼지만 다시
“살며 살아가는 행복 눈을 뜨는 것도 숨이 벅찬 것도 고된 하루가 있다는 행복을 나는 왜 몰랐을까….” 어느 날 딸이 보는 TV 앞을 지나치는데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당시 신인가수 선발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모습만 자주 보다가 오랜만에 노래를 부르는 그 가수의 모습을 보자, 순간 나도 몰래 터져 나오는 말이 있었다. “프로다!” 그러자 딸이 하는 말… “어, 저 노래 제목이 ‘아마추어’인데요….” 내가 그 가수를 보고 “프로다!” 하고 말한 데는 남의 노래를 듣고 평가하는 모습보다는 직접 노래하는 모습이 진정 ‘그’다워서 한 것이었는데, 그 ‘프로’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이 ‘아마추어’였다니 신기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부분 프로는 긍정적으로, 아마추어는 부정적으로 쓰이지만, 나는 여기서 내가 아마추어일 때의 행복을 말하고 싶다. 학교 졸업 후 꽤 오랜 외유를 하여서 동기보다 훨씬 늦게 개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자리에서 진료한지 벌써 만 20년이 되어간다. 지금도 진료실에서는 늘 긴장을 늦추지 못하는 일상을 살고 있지만 진료 시간 이후에도 업무와 걱정이 많았던 개원 초기에 비하면, 연차가 쌓이면서
운동을 전체적으로 좋아하는 저희 집에서, 1982년 시작된 프로야구는 최고의 운동 경기였습니다. 개막전을 티브이로 보던 저와 형은, 개막전 홈런을 친 이만수 선수를 보고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되었습니다. 물론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역전 만루 홈런을 맞고 진 것을 보고 펑펑 울면서도 MBC 청룡의 팬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후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고 아버지 따라 야구장에 가면서 응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희한하게도 경기장만 가면 라이온즈가 패해서 막 울면서 집에 돌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심지어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도 가서 봤네요. 유두열 선수의 홈런볼이 거의 제 옆자리에 떨어졌던 기억이 납니다.) 한동안 개인적인 사정으로 야구를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스포츠 신문을 통해서 경기 결과는 확인했었고, 포스트 시즌은 항상 시청하고 울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중 1990년도 시즌이 있는데 당시 삼성이 플레이오프를 5연승으로 통과한 기억이 있습니다. 제 기억엔 선동열 선수에게 김용국 선수가 홈런 친 장면이 기억나는데 정말 너무 좋아서 혼자 방에서 방방 뛰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엘지와 한국시리즈에서 붙었는데 4대0으로 졌습니다. 이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할아버지는 농부셨다. 젊은 시절 아버지는 농사를 짓기 싫어 도시로 나가 취업을 하고 마치 한량 처럼 지내셨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로 기억한다. 밭에서 여러 가지 나무를 가꾸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뜨거운 햇살 때문에 난 잘 찾지 않았지만 집에 동생과 있다 보면 자연스레 밭으로 나가 아버지를 찾곤 했다. 이후 아버지는 직장 관계로 밭일은 하지 않으셨지만 가끔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얘기를 하시면서 할아버지 얘기도 함께 해주셨다.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일을 하지 않는 아버지도 늘 얘기하셨던 텃밭. 아버지는 몇 년 전 집 근처 한적한 곳에 텃밭을 만들어 시간만 나면 밭에서 이것저것 키우시며 시간을 보내신다. 봄이면 거름을 주어야 한다. 아버지의 호출이 떨어지면 어디라도 달려가 아버지의 일손을 도와야 한다. 사실 아직 난 밭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수확물을 확인하려면 꽤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때가 되면 거름에 모종에 잡초도 뽑고 약도 쳐야 하고, 이것저것 손이 많이 가는 농사일은 나에겐 많이 버겁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거든 채소며 과일이 수확돼 밥상에 올라오면 이런 버거움은 곧 즐거움으로 변한다. 수확의 기쁨이 이런 것일까. 언젠가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복숭아나무는
일전에 우리나라를 알리기 위한 홍보단어로 ‘CREATIVE KOREA’란 단어를 관계기관에서 수십억 들여 만들었다 하는데 이것이 프랑스에서 먼저 사용한 CREATIVE FRANCE와 유사하다하여 표절 시비에 휘말린 적이 있었다. 만든 사람은 나름대로 연구했다 하겠지만 하고 많은 단어중 하필 이런 논란에 휘말릴 단어를 선택했나 싶었다. 많은 단어 가운데 만인이 공감하며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어휘의 선택이 중요함을 일깨워 준 사건이라 하겠다. 의학에서도 우리는 목을 모가지라 하지 않고 눈을 누깔이라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물에 쓰는 “이빨”이라는 단어를 “이”나 “치아”라는 말보다 편히 쓰진 않는다. 요즘 매스컴에 많이 나오는 치아 보장보험에 흔히들 “이를 때운다”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왜 썩은 이를 “메운다, 충전한다”는 말이 있음에도 이런 단어를 전 국민이 쓰도록 버려 두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스스럼 없이 “살이 찢어져서 병원에서 기웠어. 뼈가 모자라서 뼛가루로 땜빵했어”라는 말을 쓰는지? 요즘 치과계 산적한 일들이 많겠지만 집행부에서 이런 올바른 치과용어를 각 방송 매체에 제대로 쓰도록 요청하는 서한을 띄웠으면하는 바람으로 글을 쓴다.
3년 전 봄 저녁에 원룸 옥상에서 으르렁 거리는 소리가 났다. 가보니 웬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혹시나 물릴까 해서 겁을 먹고 지나쳤는데 2~3일 후에 다시 가보니 그 강아지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고 있었다는 생각에 물과 빵 몇 조각을 주었다. 강아지는 거의 일주일가량 그대로 있었고 매일 물과 먹을 것을 주었더니 주인인줄 알고 반가워했고 혼자 두고 가면 슬픈 소리를 내었다. 옥상에 계속 두기가 그래서 결국 원룸에 데려와 목욕을 시켰고,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결국 작은 방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개의 종은 시츄였고 암컷이었다. 이름을 ‘쭈쭈’로 지어주었다. 개를 키워본 경험이 없어, 지금 케이블에서 방영중인 ‘개밥주는 남자’에 나오는 주병진처럼 당황하기 일쑤였고 엉망이 된 방을 치울때마다 ‘멘붕’을 경험하곤 했다. 그렇게 한 달을 같이 지내다 보니 가까워져서 이제는 가족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산책을 시키다가 우연히 강아지의 주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쭈쭈를 강아지 주인에게 돌려 줄 수밖에 없었고, 방에 돌아와 허전한 마음에 며칠을 엉엉 울었다. 그러던 중에 인터넷 애견 카페에서 사정이 생겨 강아지를
‘이중섭 화가 탄생 백년의 신화’를 전시한다기에 주말, 덕수궁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덕수궁 앞은 항상 외국관광객으로 붐비는 곳. 아침, 저녁 의장대의 교대식이 거창하게 진행되자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조선 말기시절의 복장을 입고 취타소리에 맞춰 교대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탄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자주 보는 우리에게도 신선한 맛을 준다. 나도 옛날 외국여행 시 영국이나 유럽 쪽에서 그 나라의 이런 풍의 교대식을 보고 한나라의 볼거리로 만족해 보았던 추억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의 심경을 이해하기에 나는 옆쪽으로 피해주며 덕수궁 안 현대미술관을 향해 갔다. 이중섭(1916~1956)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 보통학교를 나왔는데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재직 중인 예일대학교 출신인 미술교사 임용린의 지도하에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6~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다. 제국미술학교는 당시 일본에서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동족살생의 처참한 시기, 누구나 다 여기저기 전전해가며 목숨을 이어가던 때. 이중섭도 통영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가셨다. 3.8선 이북 강원도 평강에서 먼저 월남 하신 아버지를 따라 어린 오빠 하나는 이북에 두고 한 오빠는 업고 다른 오빠는 걸려서 한탄강을 건너오신 어머니께서는 6·25 전쟁 때 맞은 총탄을 무릎에 간직하신 채 그렇게 가셨다. 모두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어려운 살림을 일구시며 힘들다는 말씀 한마디도 없이 우리 사남매를 열심히 키우셨다. 부모님의 뜻에 의해 아버지 얼굴 한 번도 못 보시고 어린 나이에 학업도 중단하고 결혼하신 탓에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학구열은 대단하셨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원효로 1가 였는데 오빠들 모두 집에서 먼 광화문 수송초등학교에 다니게 하셨고, 나 또한 당시 새로 설립된 사립 상명초등학교에 입학시키셨다. 자모회장은 늘 맡아서 많은 봉사를 하셨으며 자식들도 근면과 성실과 봉사정신을 본받게 하셨다. 나의 도시락은 항상 9첩 반상이었으며 어린이잡지 표지모델 촬영 시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맘에 들지 않으신다며 촬영을 중단시키고 그 당시 명동 미도파 백화점에 가서 새 옷을 사다 입히신 일화는 이제까지 선명하다. 내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모든 예약은 도맡아 다 해주시고 심지어 병원까지 먼저 줄서시고 계시면
반포중 부자유친에서 37명이 지리산을 성삼재 휴게소에서 오르기로 하고 2016년 5월 27일 오후 10시경에 반포를 떠나 토요일 새벽 1시 반에 휴계소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밥을 먹고 3시경 출발했는데 부슬비가 부슬거려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앞 사람이 밝혀주는 등에 의지해서 선두의 아버님들 따라서 부, 자, 유, 친 4개 조로 나눠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지완이와 선두 조로 편성되어 산행을 시작했다. 경사진 돌로 만든 등산로를 걷는데 완만한 오르막으로 되어있어 계속 걸으니 땀이 났다. 부슬비는 처음엔 좀 추운 비였는데 땀이 나자 땀을 식혀주는 고마운 비로 바뀌었다. 지완이도 가보지 않은 지리산 산행을 걱정하고 마음의 준비를 해서 그런지 조심스럽게 잘 따라왔는데 30분 이상의 오르막 길이 계속 되자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하자 땀과 비로 범벅이 된 바람막이 옷을 벗고 물기를 털며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다시 산행을 시작하여 본격적인 숲길이 시작되는 노고단 고개에 도착했다. 지리산종주시점이라는 팻말이 달린 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등을 배낭에 매달고 어둡고 좁은 숲속 길로 들어섰다. 완만하고 편안한 길이었지만
1990년대 초반이었다. 20여명의 증권회사 직원들이 회사 부근 식당에서 1차 회식을 치렀고 2차 술집으로 가기 위해 차로 이동했다. 거나하게 취한 지점장이 손수 운전을 하려 하자 젊은 직원이 지점장 차 열쇠를 낚아채 운전대를 잡고, 다른 직원들이 지점장을 밀다시피 뒷자리에 태웠다. 그때는 자가용이 흔치 않아 직원들은 택시로 따랐다. 지점장을 태운 차가 우회전하여 약 1km 정도 가다가 건널목에서 여대생을 치었다. 차를 멈춘 직원이 겁에 질려 지점장에게 애걸했다. 술은 때로는 인간의 육체를 납덩이처럼 무겁하고 정신을 아둔하게 만들어버린다. “지점장님! 사실 저는 무면허입니다. 좀 살려주십시오.” 만취한 지점장은 호기롭게 흥얼거렸다. “알았어, 그럼 내가 수습하지.” 택시를 타고 뒤따라오던 직원들은 사고 5분쯤 뒤에 사고 현장에 다다랐다. 여대생은 그 자리에서 숨졌고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 얼마 뒤 응급실로 형사와 숨진 여대생 아버지가 달려왔다. 형사가 조서를 꾸미기 위해 누가 운전했냐고 묻자, 지점장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혀가 잔뜩 꼬부라진 상태에서 자신이라고 순순히 응답했다. 그 순간 숨진 여대생 아버지의 주먹이 고함과 함께 날아왔다.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