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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철학의 만남, 양자역학과 유무상생(有無相生)

하상윤 칼럼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불확실하고 불완전한 것이 이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에 확실하고 완전한 것을 추구 하려는 것이 모순일 수 있습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는 상대적인 생각은 나를 완전한 곳에 가두지 않습니다. 경계에 서서,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열린 생각으로 한곳에 멈추지 않고 항상 운동하게 합니다.


맞다, 틀리다의 이분법적인 생각은 수많은 변수가 무수히 도사리는 현실에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불완전한 세상에서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를 찾지, 100프로를 찾는 절대적인 이론을 지양합니다.


1초도 정지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상대적인 생각, 유연한 생각에서 절대적인 힘이 나오지, 절대적인 생각으로는 절대로 절대적인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론에 기반한 지식보다, 현실에서 부딪쳐서 얻는 지혜가 현실세계에서 절대적인 힘을 갖기 때문입니다.

 

 내일 모레 돌아가시는 어머님께서 남산을 가리켰을 때 태백산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 상황에서는 태백산이라고 인정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지식으로는 남산이지만 지혜로는 태백산인거죠. 나무만 보는 절대적인 생각으로는 남산이지만 숲을 본다면 태백산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려 할 때 언제나 “확실함”을 추구합니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를 뉴턴은 중력이라는 법칙으로 설명했고, 고전 물리학은 세상의 운동을 기계적 인과관계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어 양자역학의 등장은 이러한 확실성에 균열을 냈습니다. 유명한 물리학자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할 정도로 양자역학은 어려운 학문이지만, 최근에 들어와서 전자제품, 철학, 양자 컴퓨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학문이라 생각합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는 미시 세계의 실체가 근본적으로 불확정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플랑크의 흑체 복사 스펙트럼을 설명하는식에 처음 도입된 양자개념에서 출발한, 양자역학에서는 미시 세계에서의 빛의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을 통한 불확정성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과학적 발견은 2천 년 전 노자가 『도덕경』에서 말한 유무상생 사상과 공통분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두 사유는 서로 다른 시대와 다른 맥락에서 나왔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사이에서 과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확정성 원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측정 기계의 정밀도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연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전자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려 빛을 쏘아 보내면, 빛의 광자가 전자와 부딪히며 전자의 궤적을 바꿔버립니다. 그 결과 관찰자는 입자의 ‘어디에 있는지’를 더 명확히 알수록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더 알기 어렵게 됩니다.


이 원리는 미시적 세계에서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 “확률적 가능성”만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존재란 관측될 때 특정한 상태로 드러나는 것”이라는, 고전 물리학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제시했습니다. 마치 입자가 ‘있다’와 ‘없다’ 사이의 어딘가에서 잠재적으로 존재하다가 관측의 순간에 구체화되는 듯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유무상생(有無相生)”을 말합니다. 이는 유(있음)와 무(없음)는 서로 대립하거나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의 조건이 되어 함께 존재한다는 사상입니다. 유와 무 어느 한켠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의 대립면의 경계에서 중첩된 행동을 통해 운동하는 사람, 즉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불확정성 원리와 유무상생 사상은 서로 전혀 다른 맥락에서 태어났지만, 공통적으로 실체의 독립적 고정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습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전자는 독립된 입자라기보다 파동적 성질과 확률적 성질 속에서 존재합니다. 관측되지 않을 때의 전자는 여러 가능성이 중첩된 파동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입자인줄 알았던 전자가 이중슬릿 실험에서 파동의 성질인 중첩현상과 관측 후 입자의 성질을 보인다는 건 물질이 파동성과 입자성을 동시에 가진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노자의 유무상생과 상통합니다. 세상은 유만으로 이루어져도 안 되고 무만으로도 이루어 질수 없습니다. 어느 한 켠을 구분짓지 않고 배제하지 않는 유와 무를 동시에 품을 수 있는 유무상생의 사상은 양자역학의 중첩된 파동의 불확정성 원리와 괘를 같이합니다. 불확정성이야말로 원자가 안정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만약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확정할 수 있었다면, 원자는 무너지고 우리가 아는 물질 세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무와 불확실성이야말로 존재의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두 사유는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배송업체 페덱스가 고객사였던 아마존의 강력한 라이벌이 된 건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배달의 민족도 온라인 슈퍼마켓 B마트를 통해 온라인 몰의 조용한 강자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쿠팡은 말할 것도 없구요. 비교적 확실했던 영역의 시대에서 불확실하고 모호해져가면서 서로의 영역에 대한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의 흐름을 보니, 하버드대에서 노자의 도덕경을 필독서로 지정한 이유가 설명되는 듯합니다.


슈퍼컴퓨터로 몇 천 년 걸릴 연산문제를 수초만에 처리 가능한 양자컴퓨터의 개발에 각 나라가 열을 올리는 이유도 수없이 많은 변수를 해결할 수 있는 궁극의 컴퓨터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컴퓨터의 0과1, 두가지 비트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0과 1이 동시에 존재가능한 양자중첩상태를 이용해 병렬연산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절대적인 양자컴퓨터가 탄생한다면, 우주의 비밀도 풀려진다면, 이 세상은 소리 없이 사라질 수도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불완전과 불확실성이 이 세상의 이치인데, 확실한 정답이 있는 세상이 된다면 이 세상이 의미가 없게 됩니다.

 

금을 만드는 연금술에 집착했던 뉴톤이 만약 연금술에 성공하기도 불가능했지만 만약 성공하였다하더라도 금의 희소성을 훼손하기 때문에 더 이상 금이 아닌 돌멩이로 전락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금술에 성공하였다면 금은 더 이상 금이 아닌 돌멩이에 지나지 않아 연금술이 아니라 연석술이 되겠죠. 이 대목에서 성경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빠져나오는 롯과 그의 아내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세상에 대한 미련과 욕심 때문에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았고 결국 소금기둥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집착과 욕심의 끝은 어디까지일까요?


정답이 없는 인생,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입니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