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DECA 동아리(회장 이찬주 2학년, 지도교수 김태우)가 (사)Dental Service International(회장 임구영 헵시바치과)과 연합으로 캄보디아 빈민지역에서 지난 7월 14일부터 일주일간 봉사를 다녀왔다. 지난 7월 14일(월) 저녁에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 DECA 동아리 회원들은 오랜 준비를 마치고, 연건캠퍼스 서울대학교 병원교회 앞에서 봉사에 필요한 장비와 짐들을 서울대학교 버스에 싣고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을 하였다. 참가자들은 치의학대학원생 15명, 레지던트 2명, 치과원장님 2명, 위생사 2명, 일반인 5명 등 총 27명으로 모두들 자비를 들여서 참여한 자원자들이다. 현지에서는 치과의사 1명, 캄보디아 인터내셔널 치과대학 7학년 2명, 위생사 2명, 통역사 1명이 협력을 하였다. 프놈펜에 비행기가 연착해 7월 15일(화) 새벽 1시에 호텔에 도착을 하였다. 다음 날 새벽부터 서둘러서 세 대의 승합차로 나누어 타고 깜퐁짬주의 오스와이 마을로 향하였다. 대형 버스가 들어 갈 수 없는 좁고 위험한 길이 많아서 작은 차에 분산하여 짐을 싣고 승차를 하였다. 2시간 30분 정도 이동하여 도착한 이곳은 지난번에 오지 않았던
지난 8월 20일 저녁 8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세시간 반의 비행 끝에 몽골 울란바타르 칭기스칸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2년차 전공의인 필자는 대한치주과학회와 몽골치주학회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교육 워크숍에 참석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대한치주과학회가 최근 제정한 한수부 국제협력기금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간 국내 병원에 연수 중인 몽골 치과의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몽골에 대해 들어왔지만, 직접 몽골을 방문한다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였다. 서울대학교 치과병원 치주과에서 연수를 받은 오스카 선생과 바야르 선생이 맞이해준 울란바토르 시내는 다소 어둡고 낙후된 느낌이었지만, 곳곳에서 건설중인 고층빌딩의 모습에서 변화하는 몽골의 단면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2011년 시작하여 올해로 4회째를 맞는 이번 워크숍은 “치주조직재생수술 및 치주성형술”을 주제로 구성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연세대 최성호 교수님, 경희대 신승윤 교수님, 그리고 서울대에서 구 영 교수님과 필자가 참석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워크숍에서 다루었던 비외과적 및 외과적 치주치료, 임플란트에 이어 올해는 치주재생술과 심미분야의 내용으로까지 진전된 주제로 구성된 것을 보았을
지난 6월, 모임( 중국거주 위안부 할머니 생계비 지원 사업에 참여했던 선생님들 후속 모임)에 나갔다가 김 진 교수님 제안으로 스리랑카 치과진료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마음이 분주해졌다. 나는 서둘러 개발도상국·후진국. 불교국가, 쓰나미, 실론티의 나라 등 스리랑카 관련 인터넷 검색에 나섰다. 도대체 스리랑카와 구강병리학자는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걸까? 병리학자로서 구강암 연구를 하신 교수님을 통해 스리랑카가 구강암 발병률 세계 1위 국가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발병 원인이 베텔잎과 아레카넛을 향락으로 씹는 습관과 연관된다는 짧은 지식도 얻었다.출국이 임박했을 때 치과진료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임시치과의사면허증을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발급받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임시면허증을 얻기 위해 치과대학 졸업증명서, 면허증 그리고 임상경력을 제출했다. 이번 해외진료봉사는 복잡한 서류 절차 때문에 더욱더 긴장되었다.진료 당일 새벽에 스리랑카에 도착한 진료팀과 그곳에서 개최된 국제 구강암학회에 참석했던 경기도 치위생사협회(경치위)소속 선생님들을 교수님이 진료 현장으로 안내했다. 우리들의 미션은 고산지역 차밭 노동자와 가족들의 간단한 구강검진
집 앞에 새로 도서관이 생겼다는 소식에 가보기로 했다. 눈에 띈 건 노란색 표지의 ‘Now is good’이라는 제목이었다. 원래 책을 빌리거나 살 때 책안을 살짝 들여다보고 결정하는 편인데 노란표지에 간단하고 작게 쓰여 있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골랐다.무슨 내용이든 잘 읽히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첫 페이지를 열었다. 줄거리를 말하자면 암에 걸린 고등학생 소녀 ‘테사’가 시한부 인생을 살며 느끼는 삶에 대한 욕망과, 그 소녀를 둘러싼 가족, 친구, 남자친구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테사는 죽기 전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만들고, 무작정 실현 시켜보려 한다. 그녀는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 중 어느 소설에나 등장하는 멋진 남자처럼 옆집의 애덤이 나타나 그녀의 수호천사가 되어준다. 그는 그녀가 살아있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그녀는 그와 함께하고 싶음에 죽음이 억울하고 두려워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테사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담담하다. 그러나 속으로는 애덤이 나이 들어 자신의 옆에서 코고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며, 미래에 학부모가 되어 자녀들이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꿈꾼다. 그러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점점
“OO메디컬 빌딩, XX안과…” 어릴 적부터 간판을 읽고 다니는 버릇 덕에 전 아주 길눈이 밝습니다. 그 때문인지 작은 변화도 빨리 발견하고 사물을 깊게 바라보거나 혹은 비틀어보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변화가 즐겁고 그 것을 기록하는 걸 좋아하다보니 어느새 저는 예쁜미소바른이치과 경영지원본부 마케팅과 팀장이 되어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합니다. “너 치과에서 무슨 일 해?” 지인들에게 치과에 근무한다 말한 이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부서명 그대로 치과경영을 지원하는 부서이다 보니 진료를 제외한 모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간식도 사러가고 화장실 수건도 갈아야하고 병원의 크고 작은 행사의 사회를 보기도 합니다. 수많은 저의 업무 중 가장 즐거운 일이 있다면 바로 병원 내 사보를 만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 작은 디자인 회사에서 어깨 넘어 배운 것이 바로 리플렛, 사보 등을 기획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되짚어 병원 내 잡지를 만들어 보겠다고 야심차게 말했던 신입 시절의 당돌함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다 생각될 정도로 병원의 현재를 기록하여 역사로 남기는 일은 저에게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에 입학한 직후 나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동아리의 선택이었다. 각자 고유한 역사를 가지고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는 수많은 동아리 중에서 1~2개의 활동을 선택하여 대학원 4년, 혹은 남은 평생 동안 지속해 나가야 한다는 점은 나에게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재밌게도 마지막 선택의 순간 내가 구라봉사회에 가입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실로 간단했다. ‘힘든 일을 하는 동아리니 구성원 간 유대감이 강할 것이다.’ 거기에 더불어 어쩌면 의료봉사라는 활동을 통해 ‘의료인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이런 기대감으로 나는 의욕을 갖고 동아리 생활을 시작했다.학기 중 선배들과 선생님들께서는 한결같이 입을 모아 ‘하계진료가 구라의 꽃이다’ 라는 말씀과 더불어 하계진료의 고생스러움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꼭 언급하셨다. 점점 나를 비롯한 동기들은 하계진료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부담감만 쌓아가게 되었다. 마침내 하계진료기간이 다가왔고, 버스에 몸을 싣고 도착한 경상남도 하동군 영신마을에서의 첫 날은 진료지 세팅으로 부산히 지나갔다. 저녁 식사 후 회의 자리에서의 구라봉사회를 설립하
2002년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개원한 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9년이 다 되어 갑니다. 작지만 나름 병원을 알차게 운영하기 위하여 임상은 기본이요, 경영에 대한 지식을 갖고자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려 노력하였고,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이므로 치과의사로서 소양을 갖추기 위하여 여러 교수님과 선배들, 또한 저 자신에게 많은 질문과 해답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매일 환자만 보다 보니 학창시절보다 웃음도 줄어들었고, 문득 뒤돌아보니 3만원이면 부산 아미동 시장통 분식집에서 순대와 오뎅, 막걸리로 대여섯 명이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마실 수 있었기에 행복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왜 갈수록 이렇게 삭막하게 변했을까 하는 의문과 알 수 없는 갈증에 목말라 했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데 이것이 정답인가? 많은 사람을 만나서 묻고, 알고 싶었으나 개원의로서는 한계가 많은 것 같았습니다. 또한, 후배들이 찾아와 병원 경영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어설픈 지식으로 저 자신도 이해 못 하는 경제학 용어를 쓰면서 마케팅은 어떻고, 직원관리는 이렇게 해야 한다면서, 큰소리를 치곤 했지만, 정말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연대 경제대학원 최고경제 2기 동기회 (회장 최광철)는 2014. 7. 12. (토) 당일. 버스대절로 충북 괴산에 다녀온 바 있어서 아래와 같이 몇 곳을 소개합니다.1. 괴산 (槐山) :고구려때는(475년) 잉근내근, 신라때 괴양군, 고려때 괴주군, 조선 태종때 괴산군이라고 하였다. 괴(槐)는 느티나무 괴로서 수중지왕을 뜻한다. 또 회화나무, 홰나무 라고도 하며 영어는 Pagoda 인데 길상목으로서 저택이나 학교에다 많이 심는다. 빼어난 산수절경과 단아한 지역민의 인품을 반영한 느티나무는 억쎈줄기, 고르퍼진 가지, 단정한 잎으로 되어있고 의정부는 괴부, 왕이 있는 궁궐은 괴신 (槐宸), 외교문서 보관 승문원은 괴원, 높은 자리는 괴위, 괴정이라 했고, 3정승(삼공 三公) 지위의 높은 관직은 괴당이라고 하였다. 괴산군을 상징하는 새는 (Country Bird)는 까치 Magpie이며, 꽃은 봉숭아, 인구 3만8천여명, 1읍 10면, 공무원 600여명있다. 자연 관광은 화양구곡, 선유구곡, 쌍곡구곡, 갈은구곡, 35명산 등 있으며 체험관광은 멍딩이 마을, 둔율 올갱이 마을, 조령 민속 공예촌, 사기막리 산촌 생태마을 유원지는 수옥폭포, 수옥정, 정물 놀이장,
몽골의 전통 여름 축제인 나담축제가 시작되는 7월 초, 러시아풍의 고급 레스토랑 서울에는 200여명의 몽골 치과의사들과 일부 치위생사들, 치과진료조무사 등 치과계 식구들과 몽골정부 보건부 차관을 비롯한 의료제도 분야, 구강보건관련 관리들, 한국의 치과의사회 부회장과 간호조무사협회장 및 임원들, 그리고 이날 행사를 주도한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과 몽골치과의사협회 인사들이 참여하여 향후 몽골의 치과협조인력들에 대한 바람직한 활용(Dental Auxiliary Utilization)이란 주제로 대 토론회를 가졌다.지난 수 십 년 간 몽골은 정치, 사회, 문화 체제가 구 소련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방식을 많이 따랐으며 30년전 까지만 해도 모든 학교(초,중,고가 함께 존재하여 1학년부터 11학년까지)에는 필히 학교치과진료실(School dental clinic)이 설치 운영되고 있었다. 물론 치과대학 교육도 변변치 않아 그 중 똑똑한 친구들은 모스코바에 유학가서 치과대학을 나왔지만, 대다수가 의과대학 치과학교실을 졸업하고는 정부가 지정한 보건소나 학교치과진료실을 담당하는 공공 치과의사로 근무하게 된다.그런데 1980년대 후 부터 몽골 세상이 바뀌었다. 자본주의가
군산에서 시작한 장애 아동 치과 진료가 전주로 치과를 이전 하면서 본격적으로 장애학교인 은화학교를 도맡아 봉사 한지 벌써 1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처음 귀여운 꼬맹이 손님이 치과에 왔을 때 여느 아이들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며 진료를 힘들게 했지만 치료를 해 갈수록 느껴지는 의무감이 봉사의 첫 단추였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사설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 아동의 모임을 알게 됐고 그 아이들을 위해 군산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건치) 회원 모두가 돌아가며 점심시간을 봉사의 시간으로 무료 장애 아동 치과 진료를 시작 했었습니다.이후 전주로 치과를 이전한 저는 이곳 전주에서도 특정 학교를 정해 봉사하기로 계획을 하였고 이미 자림원 봉사 활동을 하는 전주 건치에 합류 할까 하다가 일요일 진료 시간이 맞지 않아 주중에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찾던 중 전주시 보건소 구강보건팀이 장애 아동 진료를 구상 중임을 알게 됐고 팀장이 예전 공보의 시절 같이 근무했던 치과위생사인 기막힌 인연으로 함께 은화학교를 선정하여 봉사를 시작 했습니다.유치부에서 고등학교까지 약 300명의 학생들을 검진하고 치료하고…. 그런 시간이 벌써 15년을 넘다 보니 이젠 아이들도 학교의 선생님으로
나는 영화보기를 무척 좋아한다. 돌이켜보니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한 대학시절부터 연극, 영화를 많이 찾아다녔고 결혼이후 이런저런 역할에 바빠서 취미생활의 필름이 끊겼었다. 그러다 약 5년 전 지금의 직장에 입사하여 같은 대학 연극부 후배와 동료로 일하면서 다시 취미생활에 불이 붙었다.처음엔 보고 싶은 연극을 쫓아다녔는데 시간, 공간적 제약이 많아 자연스럽게 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다.진료하는 주중보다 휴일인 주말엔 더 바쁘고 치열하다.아직 수험생인 두 아이들의 스케줄과 투정을 피해 아주 치밀하게 영화와 가능시간을 찾아 예매하고 주차시간도 부담스러워 택시를 타는 경우도 많았다.이렇게 허덕이면서 취미생활을 고수하다가 최근엔 “엄마도 힐링이 필요해”라며 주말의 일정시간은 완전히 자유를 보장받았다.왜 내가 영화에 이렇게 몰두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나의 영화에 대한 ‘공감’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상황과 인물에 대한 깊은 공감과 일치감은 어느 순간 나 자신의 상처와 부끄러움과 후회 등을 끄집어내어 보듬어주고 위로해주며 그 당시엔 몰랐던 새로운 관점으로 나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최근에 본 영화 ‘그녀(Her)’도 공감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영화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