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수행의 길 젊었을 때는 그냥 살기 위해서 열심히 했는데 이제 나이 40을 넘으니까 인생을 관조하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옛말에 불혹이라는 말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다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것은 삶에 대한 자세가 아니라 방법론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즐겁게 살자고 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그런 머리 아픈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전체적인 흐름이 없기 때문에 인생이 무의미하게 지나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각자 나름대로 삶에 대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생을 하나의 수행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즐겁고 좋은 일만 일어나길 원하지만 그렇게 하면 인생의 참맛을 알지 못하게 됩니다. 반드시 쓰고 어려운 일을 겪어보고 그것을 이겨가는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냥 그것을 겪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은 내가 삶을 살면서 겪는 하나의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인생의 모든 어려움들을 보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저는 환자를 보면서도 내가 이 사람과 교감을
당신 멋져 해 마다 12월은 각종 송년행사로 늘 시간에 쫓긴다. 꼭 참석을 해야 하는 모임이 같은 시각에 두 세 곳 잡힐 때는 난감할 때도 있다. 송년 모임의 의미를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모임에 따라서는 일 년에 한 번 대면하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경우도 있다. 단순히 친목을 다지는 모임도 있고 일 년을 결산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는데 아무튼 회식은 항상 뒤 따르기 마련이고 회식자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건배순서이다. 재미있는 것은 건배하는 구호가 해마다 바뀌고 모임마다 다르다.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각종 구호들은 저마다 해석이 그럴싸하다. 괜찮은 구호를 듣게 되면 다른 모임에 가서 써먹어 볼 심사로 머리에 기억해둔다고 하지만 기억력과의 싸움이 치열한 나에게 막상 다른 모임에 참석할 때 쯤엔 이미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후로 제대로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만다. 그렇지만 아직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구호가 있다. 지난 연말 그 날은 대학원 동문 임원들의 송년모임 회식자리인데 마침 은퇴하신 대학원장님이 함께 하셨다. 식사하기 전 대학원장님의 간단한 덕담과 함께 여느 행사장에서처럼 건배 제의가 있
Onko walking 50을 넘기면서 부터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아플 때 마다 선배 치과의사가 대단하다 느끼곤 한다. 확실히 나이가 들면 들수록 화두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인 것 같다. 치과의사란 많은 스트레스와 육체적 고통이 따르는 중노동에 가까운 만큼 우리 모두들 건강에 유념해야만 한다. 영양제니 보약이니 몸에 어디 좋은 것 없나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없지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이미 알려진 바다. 건강에 좋은 여러 방법 중 10년 전쯤 소개됐던 아주 간단하고 돈 안 드는 건강유지법을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미 알고 있을 동료 분들도 많겠지만 이번 기회에 실천하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Onko walking을 소개하고자 한다. Onco(onko)라는 뜻은 희랍어로 부스럼, 종양이란 뜻으로 요즘에는 암(癌)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한다. 직역하면 암걷기, 즉 ‘암을 예방하는 걷기’라 말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면역력을 증진시켜서 모든 병의 예방에 탁월하다는 것이다. 거창한 단어로 다가 오지만 그저 걸으면 몸이 좋아진다는 것이 Onko walking이다. 일반적으로 걷는
아이폰 (하) <1905호에 이어 계속> 핸드폰을 들고 거리를 걸으면서 고민했습니다. 누구에게 첫 통화를 할까? 그래도 단축번호 일번이 남편이었는데 남편에게 걸어야지 신호음은 가는데 어라? 받질 않습니다. 2번에게 했습니다. 딸도 안받아요. 그리고 3번 물론 안받습니다. 이 실망감… 곧 딸이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전화 개통했어?”, “응, 잘 들려?”, “그럼 저녁에 일찍오세요. 제가 정리해 드릴께요” 통화 내용은 간단했지만 전화를 받았다는 기쁨과 새것을 가졌다는 유치한 심리가 어우러진 행복을 맞보았습니다. 하루를 어찌 보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람들 간에는 텔레파시가 있나봅니다. 그렇게 많이 오던 전화가 절 도와 주느라 몇번 핸드폰을 꺼내 혹시 이상 유무를 확인할 정도로 냉장고였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귀가하여 기다리던 딸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먹는거 외에 카카오가 있는지 처음 알았고, 핸드폰 끼리 퉁하고 부딪치기만 해도 자료가 날아가고, 재미나고 유용한 어플들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놈의 뚱뚱한 엄지입니다. 도대체 눌러서 정확한 타율이 30%가 되지 않습니다. 핸드폰을 가로로 하여 새
아이폰 (상) 휴대폰을 바꾸었습니다. 오래된 휴대폰의 익숙함에서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얼핏 보기에 요즈음 터치로 하는 스마트폰들이 꽤나 까다로울 거 같아 계속 미루기만하다 대세를 피할 수 없어 구매를 결심하였습니다. 요즈음은 물건 구입 시 뭐가 그리 까다로운지 디자인을 선택하여 구매할 수만도 없어요. 통신사도 알아봐야 하고 같은 기종이라도 조건을 봐야 하고…. 휴~~~~ 그래도 기왕 새로움에 도전이다 싶어 과감히 아이폰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세뇌된 ‘애국주의=국산품 애용’이라는 공식이 잠재되어 있다 보니 외국 제품을 구입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그 많은 생산품을 구매해 주는 다른 나라 소비자들을 상기하며 제 자신을 정당화 하면서 말입니다. 구매를 하는 과정부터 난관입니다. 남편과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들른 대리점의 상담자는 민낯에 청바지를 입은 허수레한 아줌마의 구매의도가 과욕이라 싶었던지 계속 “사용이 어렵고 불편 하실걸요”를 반복하며 단점만 설명하고, 좀 더 쉬운 제품을 자꾸만 권합니다. 그런 대화와 응대가 내 모습이 남들 보기 그리 문명에서 먼 나이든 사람으로 보이나 싶어 서글
스마일마라톤대회를 마치고 지난 10월3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내 평화의 공원에서 치과인들이 처음으로 만든 스마일마라톤 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대회전날까지도 강풍과 비바람으로 대회의 진행자체가 불투명하였으나, 모두의 염원 덕분인지 대회 당일날 새벽부터 비가 정말 감쪽같이 그쳤었습니다. 대회가 끝날 무렵에야 다시 시작된 비를 보면서 모두의 바람은 하늘도 감동시킨다는 말이 새삼스레 떠올랐습니다. 대회의 공식명칭은 구강암과 얼굴기형 환자를 위한 스마일마라톤대회로 정하였습니다. 대학병원 레지던트 시절 보았던 많은 구강암환자들과 얼굴기형 환자들 그리고 그들에게 웃음을 되찾아 주고자 했던 교수님들의 열정을 보면서 동기부여를 받았었습니다. 이 대회의 아이디어는 1년전 유방암 예방 및 후원을 위한 핑크마라톤에 치과인마라톤회의 박성진 회장님과 제가 일반인으로 참여하면서 처음 가지게 되었습니다. 치과계에는 치과의사, 위생사, 조무사, 기공사, 치재상공인 등 많은 분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하는데 대국민을 상대로 한 축제나 대회가 전무한 것이 안타까웠고 구강암 등의 구강영역 질환을 가진 환자들에 대한 홍보의 장도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작은 아이디어와 용
혁신의 출발에 선 2011년!병원 마케팅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2011년 신묘년, 새해 새로운 태양이 떠오른 지도 벌써 열흘째이다. 많은 병원들이 2010년 경제한파와 경영난으로 어려웠던 2010년의 침체되었던 분위기를 쇄신하고, 병원을 개선하고 혁신하여 2011년은 성과가 있는 한 해로 바꾸겠다는 당찬 결의를 했을 줄로 안다. 그러나 필자도 잘 알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결심을 실천해 나가기란 막상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를 꾀할 것인지 그 핵심을 잡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특히 올해 대안으로 본격적인 마케팅을 통해 병원의 성장을 이루어나가겠다고 결심하시고 준비하시는 원장님들을 많이 뵙게 된다. 2011년은 더욱더 경쟁이 치열해지고 마케팅의 기법과 수단들도 점점 다양해질 것이며, 벌써부터 이러한 흐름에 따라 발 빠르게 움직이는 병원들도 물론 눈에 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이러한 마케팅과 다양한 병원의 활동들이 환자의 니즈를 반영한 것인가 하는 부분이 가장 먼저 고민이 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여전히 많은 치과들이 환자의 니즈를 간과한 채 ‘우리 병원은 환자중심의 진료를 하고 있고
내 복(內服) 나이가 들어 글을 쓰면 대개 지난날을 회상하는 글을 많이 쓰게 된다. 고생을 많이 했다느니, 잘 살았다느니, 기뻤다느니, 행복했다느니 등등 곱씹을 일들을 되짚어 보면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내 속내는 이런 정형화 된 글을 쓰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복하면 ‘빨간 내복’의 추억을 떨칠 수가 없다. 아마도 또다시 회상과 추억의 글로 빠질 것 같다. 내복은 우리네 입성이 아니고 유럽 사람들의 의류로 생각되나 사실은 삼국시대부터 입었던 속옷이란다. 내복은 유럽지역 외에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도 입는다. 추운 고구려에서는 동물의 가죽으로 내복을 만들어 입었고, 조선시대 부유한 양반들은 솜옷으로 내의를 만들었고, 가난한 양반이나 상민들은 개가죽으로 내복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동지방 사람들은 기능성 내복보다는 다발로 된 흰색 면 내복을 선호한단다. 그 이유는 물이 귀해 매일 세탁을 할 수가 없어 그냥 10일 정도 입다가 벗어 버리기 때문이란다. 참 편리해 보인다.아프리카에서는 내복이 필요 없어 보이나 심한 일교차 때문에 긴 내복이 중요하단다. 아마도 아프리카에서는 중동처럼 한번 입고 버리지는 않겠지? 요새 내복이 과학이다. 발열 내복을 보자. 두
스트레스 하나 줄이기 인간은 항상 생각하고 연구하며 편리성을 추구하는 동물이라고 했습니다.필요에 의해서 발명이 되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발달된 문명의 이기로 인간의 수명 또한 연장하여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리 인간이 저질러 놓은 과학문명의 폐해가 다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굳이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아도 환경의 파괴가 우리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피해가 점차 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에서 본 기사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인간의 발명품 중 자동차, 에어컨, TV가 생활자체를 변화시켰다고 합니다. 자주 걷는 운동이 필요한 인간에게 자동차는 특히 자가용은 걷기의 제약을 선사했고 에어컨에서 나오는 공기와 대기 중에 공기차이로 인한 호흡기 질환이 만연되고 TV로 말미암아 가족 간의 대화단절은 물론 인간이 획일화 되는 부작용이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부작용 이외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훨씬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문명의 이기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기는 했지만 환경호르몬이나 유전자 변이식품, 운동부족,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아야 하는 스트레스 등으로 각종 질환을 갖고 지내는
남도 일번지 ‘강진’ 강진! 가장 한국적이고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유홍준 교수가 일컬었던 한국 최남단의 땅. 20여년의 세월 속에 내 삶의 희노애락이 한데 어우러져 섞여 있는 곳이다. 내겐 어머니의 품속 같은 제2의 고향이 되어 버린 셈이다. 말로 표현하기 부족할 정도로 세상은 급변하고 있지만 이 곳은 아직도 느린 거북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남도의 여유로움과 포근함이 남아 있어 좋다. 치료가 끝나면 홍시나 바지락 같은 해산물을 갖다 주는 친정 엄마와 같은 환자들을 대할 수 있어 마음이 훈훈해진다. 매일 진료실에서 반복적인 진료에 임하는 회원님들께 잠시 쉬어가도 후회하지 않을 이 곳 강진을 소개하고 싶다. 전국 어디를 다녀봐도 군단위에서 산과 강과 바다가 하나로 조화를 이룬 곳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보은산 우두봉에 올라가 보자. 월출산과 유치계곡으로부터 흘러오는 탐진 강물 자락이 굽이굽이 한눈에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태풍이 와도 미동도 않을 것 같은 기다란 강진만과 저 멀리 완도의 섬 남해 바다까지 확 트인 전경은 속까지 후련해진다. 밟으면 깨져버릴 듯한 날카로운 암성 봉우리로
나의 역사문화 활동 (하) <1898호에 이어 계속> 1994년 맏딸의 미국 플로리다대학교 박사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가 경상대학교 정경대학학장과 진주문화원장을 역임한 정치학박사인 맏형의 부고를 받고 급히 귀국했던 일이 있었다.지난날 진주는 소년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적인 논제를 형님이 제시하였으나 당시 역사의식이 비천했던 나로서 큰 감흥이 없었다. 시대가 흘러서 진주의 문화지킴이로 탈바꿈한 나는 1995년 진주정신으로 진주문화를 부흥하는데 이바지 하자는 뜻을 세워 진주문화사랑모임을 결성, 망진산 봉수 복원, 진주걸인기생독립만세운동 재현, 진주팔경제정, 형평사운동의 주역 신현수송공비이전, 일본에 빼앗겼던 진주대첩의 김시민장군 공신교서 환수운동을 성공리에 마무리하는 등 쉴 사이도 없이 활동하고 있었다. 2007년 5월 문화동지이며 후배인 강동욱 박사가 소년운동의 발상지 표지석을 역사복원사업으로 나에게 권유하고 난 후 경남일보에 진주에 어린이운동 발상지 표지석을 세우자는 논지와 어린이 날 제정의 주역 ‘진주사람 강영호’ 선생에 관한기사를 연달아 발표했다. 이어 오마아뉴스 윤성효 기자의 ‘소년운동 선구자 강영호를 아십니까’라는 기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