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 2022년을 힘차게 맞이하겠다는 마음으로 어머니와 함께 부지런히 동네 뒷산을 올랐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르곤 했지만, 새해라는 생각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어둠을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정상에 도착했다. 어둠을 살라 먹고 떠오르는 밝은 태양을 보며 나는 호랑이와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임인년 새해가 호랑이 해이기 때문이고, 매년 아버지 당신이 새해를 맞이하던 바로 그 장소에 이제는 내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내 아버지는 나에게 당신의 소중한 “말씀”들을 남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 말씀들이 여전히 살아 내 삶의 분명한 이정표가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병·의원 전문 관리회계, 인사 노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하며 어려움에 부딪히면 “전공도 아니고, 의료진도 아닌 내가 왜 이런 걸 하겠다고 한 것일까?” 한탄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 마음이 생기면 법학이 전공임에도 사법고시 대신 외무고시를 공부하고 2차에 떨어진 내게 당신이 해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금광에서 금을 캐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금광인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금광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이다. 네가
계절의 굴레 속에서 立冬(입동)을 지나는 이때쯤이면 아침으로 제법 쌀쌀한 기온으로 주위에서 환절기로 생체기를 겪으며 겨울을 무난히 지내기 위해 면역력을 키우고 있는 우리네 인간들이 거룩해 보이는 요즈음……. 모든 자연의 생명들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 나뭇잎을 떨구거나 동면을 통해 지혜를 실천하고 있음을 바라보며 인간들도 1년 간의 매무새를 정갈하게 비우고 내려놓는 마무리를 통해 자연의 흐름 속에서 나는 과연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백팔 배와 瞑想(명상)을 끝내고 돌아앉아 맑은 차를 마시며 想念(상념)에 잠겨 본다. 오래 전부터 행해오고 있는 이러한 닦음을 통해 투명해진 나에게 무엇을 남기고 또 어떠한 숙제로 남았을까 생각해 본다. 수많은 법정(法頂) 선사의 말씀 중에 “자기 자신만의 투철한 질서를 가지고 『홀로 있음』을 경험하면서 자유인이 돼라!”는 귀한 가르침이 있는데, 이는 걸리적거리는 주위환경을 잠시 물리치고 자신을 들여다보고 맑게 하는 닦음을 통해 沈默(침묵)의 의미를 담으라는 큰 가르침으로 이를 잘 담아내고 있는 내 자신이 대견스럽게 여겨진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부처가 태어나자마자 일갈했다는 『天上天下唯我獨尊(천상천하유아독존)』
재능기부로! 김치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기쁨을 저소득 중증 장애인에게 주는 스마일재단. 더스마일치과의원과의 만남. 2016년 코엑스에서 학술대회의 강의를 마친 후 강단에서 내려오는데 대학 은사이신 이긍호 교수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대학에서 정년 퇴임후 장애인 구강보건 증진 지원 비영리재단인 스마일재단의 장애인 치과 진료소인 더스마일치과의 센터장으로 정년 후에도 평생 수고하신 장애인치과진료를 계속하고 계셨다. 교수님의 러브 콜(?)로 2016년 11월 30일부터 더스마일치과에서 월 1, 2회 구강외과 수술을 하고 있다. 5년간 다양한 환자를 전신마취 국소마취로 진료를 하였다. 전신마취 환자는 마취과 선생님의 도움으로 비교적 쉽게 진료는 하지만 마취가 깬 후의 과정이 많이 걱정되어졌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이 깰 때보다 대부분 온화하다. 왜 그럴까? 아마도 더스마일치과의 직원 모두의 사랑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없이 직업으로만 담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또 환자 중에는 목의 일부 각도만 움직일 수 있는 전신마비 환자도 있으셨다. 환자에게 맞추어 내 몸을 조절하여 수술을 해야 한다. 수술 후 몸의 피로감은 매우 심할 수밖에 없다. 느끼는 마음 속에 사랑을 가지고 해
모네(Monet)의 그림을 보면 깔끔, 단백, 따뜻함이 느껴진다. 참 잘 그리는 것 같다. 그림에는 문외한이라, 그림 평은 여기까지만. 대가나 장인(Master, Professional)들은 자신만의 색이 있는 것 같다. 렘브란트(Rembrant)도 그렇고 고흐(Gogh)나 마스티(Matisse)도. 대중음악에 비유하면,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도 그만의 색처럼.(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다.) 기독교적인 기준이나 시각을 떠나, 음악 그 자체로만 보면 너바나가 비틀즈보다 더 천재적이고 획기적이었다고 생각한다.(*Classic Music은 모차르트(Mozart)가 최고라고 생각함.) 그 이유는 너바나의 음악이, 커트 코베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락 음악계의 패러다임을 확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비틀즈도 그러했지만, 너바나의 그것이 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쳤던 것 같다.(두 울트라 슈퍼밴드의 활동 시기와 시대 배경이 서로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더라도 말이다.) 더 나아가, 락 음악(Rock Music)을 너바나 전과 후로 나눠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너바나 전에는 웬만한, 거의 모든 곡들은 멜로디, 화음, 리듬, 전주, 간주, 후주(애드립 속주 또는 기교) 등의
저는 구순구개열 기형을 갖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서울대학교 병원, 연세대학교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수술을 받았죠. 그런데 저 때는 아직 치료에 대한 프로토콜 같은 게 정립이 되기 전이라 그런지 결과가 그렇게 좋지는 않습니다. 교정치료도 늦게서야 받았는데 그마저도 다 재발되었고 교정치료를 받는 중 막았던 구개파열 부위도 다시 벌어져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될 정도는 아니지만 비강과 구강이 열려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치조골이식도 받지 않았구요. 제가 치과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은 치과의사가 돈을 잘 번다는 외할머니의 강력한 권유도 있었지만 저 같은 악안면 기형을 가진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련을 생각할 때도 외과 말고는 생각이 없었지요. 비록 몸은 너무너무 고되었지만 악안면구강외과 수련 생활은 참 제 적성에 맞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그만 수련을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지난 삶을 돌아볼 때 후회하는 게 그렇게 많이 있지 않는데 이 부분은 참 많이 후회가 됩니다. 제가 치과의사가 된 이유가 사라져 버렸으니까요. 외과 수련을 받지 않아도 다른 것은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악안면
Relay Essay 제2472번째(2021년 11월 1일자) 게재 내 어머니! 올해가 탄신 100주년입니다. 돌아가신지도 벌써 38년. 1967년 1월 12살 촌스런 단발머리 제주 소녀는 제 몸만한 검은 가방을 등에 지고 제주부두를 떠납니다. 목포 가는 배 안성호에 소녀를 밀어 넣고 부둣가에 서서 당신 딸이 탄 배가 서서히 멀어져 가는 걸 손 흔들며 오래도록 지켜봅니다. 배를 타고 난생 처음 혼자 가는 서울 길의 어린 촌년도 눈물을 글썽이며 멀어지는 섬 위의 한라산이 안 보일 때까지 바라봅니다. 3등칸 배 밑창에 다닥다닥 붙어 누워 8시간을 지내고 어둑한 목포항에 도착. 줄지어 호객하는 식당 사람을 따라가서 저녁밥을 먹고 잠시 눈 붙이는 사이 그들이 서울행 완행 야간 열차표를 사다줍니다. 땅을 밟아 멀미의 느낌을 식히고 목포역에서 밤 10시경 출발한 꽉 찬 야간열차엔 입석표를 산 가난한 어린이가 엉덩이 댈 만한 공간도 안 보입니다. 돈을 아껴야 고단한 서울에서 살 수 있다는 제주 어머니의 조냥정신. 절약정신. 통로에 서서 졸며 깨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새벽녘 기적소리와 함께 추운 서울 공기가 얼굴로 훅하고 다가옵니다. 너무 추웠습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불빛 없는 동네 뒷산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왠지 모르게 무서움과 나약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돌아가고 싶은 충동. 어두워지면 나타나는 두려움. 어둠속에 홀로 있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그러나 이 시간, 가끔, 아주 가끔 찾아와 주는 안장 위 나와의 ‘대화의 시간. 어두운 산속 한가운데에 있으니 2011년 처음으로 참가했던 아산 280랠리가 떠오르며 카메라가 나를 비춘 장면이 그려진다. 한 중년 남자가 비를 맞고 서 있다. 그 남자는 하루 종일 내리는 장마비에 온몸은 다 젖어있고 추위에 손을 바르르 떨며 부르튼 빵을 먹고 있다. 그는 이 랠리가 끝나면 라면을 아니 곱빼기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 팍팍한 개원 생활에서 탈출하고자 아무 의미없이 참가한 랠리.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고 긴 산속 임도를 넘으며 저 산 너머에 뭐가 있을까 저 앞에 보이는 저 산을 넘으면, 그 다음 산엔 뭐가 나타날까? 아직 가야할 거리의 반도 못 갔는데... 뭔가 새로운 것을 그리며 산을 넘는데 이 산을 넘고 나서 보이는 건 역시나 이전에 지나쳐왔던 산들과 단지 모양만 조금 다른 저 산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비슷비슷한 어제 오늘 내일이 아무 의
#장거리 라이딩 - 고립감 속의 자유 장거리 라이딩을 하다보면 밤을 맞이하게 되는데 밤이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어둠 속에서 달리다 보면 이런 저런 상념들이 자연스럽게 스며온다. 장거리 라이딩이 주는 압박감 - 거기서 느끼는 고립감. 라이더는 그 고립과 단절을 온전히 페달링만으로 극복해내야 한다. 완주를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회전운동속에서 극한의 육체적 고통이 밀려오면 어느새 내면에 안고 있던 고립감이 객관화되면서 상처받고 힘들었던 마음이 서서히 치유가 된다. (마라톤이나 무박 산행시 극심한 육체적 고통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과 같은) 고통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개방했을 때 길은 비로소 자신의 속살을 내어주며 나의 속살을 부드럽게 힐링시켜 준다! 묵묵히 핸들을 붙잡고 오로지 페달을 계속 밟는 고독한 작업 - 장거리 라이딩 (이하 랜도너링이라 하겠음)~. 똑같은 일의 끝없는 되풀이. 랜도너링엔 오르막이 있고 평지가 있고 내리막이 있고 순풍과 역풍이 있다. 워낙 초장거리이기에 주어진 조건 속에서 효과적으로 나를 연소시켜야만 완주할 수 있다. 오버페이스는 금물,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근육과 산소게임을 하면서 아슬아슬한 긴장 관계를
#옥천 어렸을적 동네 앞을 흐르던 강은 옥천이었다. 섬진강 지류로 물이 맑아서 여름이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옥천으로 가서 멱을 감고 고기잡는게 하루의 일과였다. 어쩔땐 밤에 손전등을 들고 입큰 메기를 잡으러도 갔다. 그시절 ‘저산은 어디쯤 가서 끝나나, 강은 어디서 흘러 오나‘ 그렇게도 궁금했었는데... 인터넷 지도를 보니 강천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옥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동네를 지나 유등과 곡성 옥과를 지나 지리산에서 흘러 내려온 요천과 합수된다. 곡성 고달쯤에서 어느덧 큰 물줄기로 바뀌면서 섬진이라는 이름이 되어, 구례로 하동으로 흘러 흘러 남해에 가 닿는다. #광주천 광주사람이라면 누구나 광주천변 한번쯤은 걸어 봤을거다. 나 역시 학생때 광주공원 포장마차에서 늦게까지 술 먹다가 택시비 아끼려고 자취방이 있는 전대 후문까지 걸어가면서 검게 매마른 광주천변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광주천을 생각하면 추운 겨울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천변을 뛰듯이 걸어가는 나의 모습이 아련하게 겹쳐 떠오른다. 그 냄새나고 시커멓던 광주천이 이제는 아름다운 강으로 바뀌어 천변 산책하기에 참 좋아졌다. 가족모임에는 일부러 (세상에 없는 따악 광주에만 있는) 맛있는 메밀국수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어떤 끝이냐가 어려운 것이다. 이제 70 중반을 향한 나이가 되니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돌아보면 많은 고난과 역경을 지나왔고, 나름 보람을 느끼는 일도 많았다. 어머니 등에 업혀 전쟁을 겪었고, 모두가 어려운 형편의 시절을 근근히 넘어왔고, 선한 이웃과 동료, 스승의 도움으로 치과의사가 되어 이제 원로 소리를 듣는 처지가 되었다. 성경에는 ‘희년’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50년이 될 때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고, 빚을 탕감해주는 해방의 축제를 말한다. 이제 내가 치과의사 면허를 받고 의료인으로 삶을 영위한 지 50년이 다가온다. 그동안 노예로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주로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하여 살아왔다고 생각이 든다. 내 학창 시절과는 다르게 내 자식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해주려고 애썼고, 부모로서의 책임을 늘 무거운 등짐처럼 느끼며 살아왔다. 치과의사로 살아오면서 얼마간의 보람과 성취를 느끼며 지낸 것은 분에 넘치는 은혜라고 생각된다. 내 능력에 비해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것도, 탁월하지 못한 진료 능력에도 불만 없이 오랫동안 환자와 의사의 관계를 이어준 많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커피를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Billy Joel이 부른 ‘Honesty’라는 노래를 듣다보니 여러 가지 상념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중학교 때 ‘Honesty is the best policy!’라는 영어 속담을 배웠을 때 선진국인 미국 사람들은 다 정직한 것으로 알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미국인이라서 더 정직한 것은 아니지만 그 사회가 정직을 덕목으로 삼고 있는 분위기는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思いやり(omoiyari)’를 몸에 배이게 하는 게 교육목표라서 대체로 나대지 않고 조용하다. 한국에 비해 고소, 고발사건도 드물다. 몇 해 전 신문에 게재된 신간안내의 내용을 보니 그 해 위증죄로 기소된 사람이 1400명으로 일본의 172배, 인구수를 감안하면 430배이고, 무고건수는 500배로 1인당으로 환산하면 1250배나 된다고 해서 적잖이 놀랐다. 일본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어 일본보다는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그렇게 높을 줄은 몰랐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거짓말을 잘 하는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같은 해 자동차보험, 생명보험, 손해보험, 의료보험 등의 보험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