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한국인, 작은 거인을 만났다. 그는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이지만 그의 이상과 그가 이룬 업적은 세계를 제패했다. 서병인 비스코 사장. 경영인이자 화학자인 그는 경영보다 연구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가 개발한 치과용 접착제는 현재 세계 70개국의 치과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가 발표한 연구논문만도 200여편. 웬만한 대학교수보다 낫다. 그의 명성이 자자해 지자 세계 유수 대학에서 앞다투어 그를 초빙하여 그가 이룬 연구결과 등에 대해 경청하고 있다. 기자가 시카코 본사를 찾았을 때도 인터뷰 다음날 캐나다로 강의하러 떠났다. 비스코 학술강연이 있던 날 일리노이치대 소진문 교수가 자신의 학교에 와서도 강의해 달라는 요청을 하자 일정을 수개월 후로 잡기도 했다. 무엇이 그를 만들었을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항상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나니 부도 명예도 따라 오더라….” 세계속에 한국을 빛내고 있는 서 사장. 그가 누구인지 살펴본다.
세계속의 한국기업 비스코사를 가다
서병인 사장 특별 인터뷰
주린배 움켜쥐며 벨보이 등 “고생 고생”
고급 연구요원 확보 새 제품 개발 구슬땀
교정용 접착제 납품 회사 발전 기틀 잡아
도약을 꿈꾼 유학시절
서병인 사장은 지극히 평범한 셀러리맨이었다. 성균관대 화학공학과를 나온 그는 곧바로 한국 현대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회사인 충주비료에 입사했다. 그곳에서 남들보다 비교적 빨리 승진한 그는 그러나 거기서 만족할 수 없었다. 더 늦기전에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다짐한 그는 당시 어느 특정인만의 소유였던 해외유학을 꿈꿨다.
그 당시 외화 50불 이상 유출하지 못하던 때라 단돈 50불만을 손에 주고 유학 길에 오르던 날 절친한 친구가 그의 손에 담배를 쥐어주었다. 비행기 안에서 꺼내본 담배 한 개피에는 10불짜리 지폐가 말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친구의 고마움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접시닦기를 하던 일,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토요일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벨보이를 하던 일, 첫학비가 없어 쩔쩔 맬 때 한 흑인 학생의 도움으로 등록하던 일 등등 고생하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당시 돈이 없어 모터 사이클을 타고 아르바이트하던 그는 어느날 자동차사고로 50여 미터를 끌려가는 변을 당하기도 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던 사고였는데 다행히 무사히 넘긴 것이다.
그리고 1년 후 학교에서 연구조교로 발령나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일들이 결코 고생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목표가 있었기에 그러한 일들이 별거 아니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미국 직장생활
대학을 졸업한 그에게 미국에서의 첫직장이 시카고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시카고와의 인연이 이렇게 시작 됐다. 바닥 왁스 등 집안 소제 재료를 만드는 회사인 메디슨 케미칼社(Medison Chemical Co.)에서 그의 미국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 회사 대표는 성실하게 연구하고 있는 그를 신뢰했다. 2년만에 선임연구원이 될 정도로 사장의 신뢰는 두터웠다. 그 사장은 자신이 직장을 옮길 때마다 그와 함께 했다. 치과계와 인연을 맺게된 것도 그 사장 덕분이었다.
그 사장이 자리를 옮긴 회사가 치과재료를 만들던 에릭슨(W.A.Erickson)사였다. 여기서 그의 진가가 발휘됐다. 69년 당시 존슨 앤 존슨사에서 어댑트 컴퍼짓트의 초기제품을 만들자 이와 같은 제품을 만들라고 지시한 것.
곧바로 연구에 들어간 그는 아무런 자료도 없었지만 이리저리 자료를 뒤져가며 1년 반만에 독학으로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 냈다. “이때 순수화학에 대해 상당히 많이 배웠습니다.”
이 회사는 급속히 발전할 수 있었다. 그는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 연구에 몰두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40줄에 다가오면서 직장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싶었다. 미래를 보장받고 싶었던 것. 그때 임원에 넣어 달라고 했다. 사장은 흔쾌히 승낙했으나 실제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를 설립하다
서병인 연구원은 뛰쳐 나왔다. 그 당시 나이 42~3세 정도. “더 이상 나이를 먹으면 평생 월급쟁이가 될 거라는 생각했어요. 그러나 막상 일을 저지르려니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내(정민숙)가 한번 해보라는 격려는 내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당장 사표를 냈어요.”
그러나 옵션에 걸려있어 1년동안은 동일한 비지니스를 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운명의 여신은 부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동안 뉴욕에서 인공 뼈를 개발한 마이클의 요청으로 컴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