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기있고 순한 두 후배의 얼굴이
가슴에 깊이 각인돼 있는 탓…
추억의 한라산22년전(1981년 8월 1일) 저녁.
갑자기 집사람이 비명을 지르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TV뉴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치대 산악회 후배가 한라산에서 사고로 두명이 죽고 두명이 중태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아연실색(啞然失色). 낙뢰사고였다.
당시 난 6년차의 개업의 이었는데 재학생 하계등반에 집사람과 함께 참석했었다.
지리산 종주를 함께 야영하면서 산행하고 우리 부부는 상경했고, 후배들은 한라산 등반을 떠났었다.
집사람도 재학생과 정이 들었었는데 사망자로 이름이 둘이나 나오니 경악할 수밖에.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이번 여름(2003년 8월 3일)
한국산서회 2003년 특집 한라산 자료 수집차 제주도를 찾았다. 떡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마침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한라산 등산길에 올랐다. 영실에서 출발한 산길은 녹음이 우거져 생각보다 시원했다. 학창시절의 산행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1967년의 첫 하계등반, 1970년 초 적설기 한라산 동계등반이 가장 추억에 남아 있었다. 특히 적설량이 많았었던 겨울 용진각 대피소 옆에 이글루를 짓고 그 속에서 잠을 잤던 추억이 가장 강렬했다.
역시 한라산은 명산이었다. 특히 백두산과 닮은 점이 많았다. 금상첨화로 날씨가 맑아 조망이 너무 좋았다.
화산의 폭발에 의해 생긴 수많은 오름이 꼭 경주의 왕릉처럼 솟아 아름다웠다.
오백나한의 기암절벽이 내려다 보였고 병풍바위를 기고 오를 땐 경치가 아름다워 기분이 너무 좋았다.
윗세오름 조금 못 미쳐 우린 오른쪽으로 길을 잡았다. 엉겅퀴가 가장 많이 꽃피어 있었는데 그 가시에 반바지 입은 다리가 찔려 아팠다. 특히 파래난초가 앙증맞게 예쁜 꽃을 뽐내고 있었다.
정상부의 북벽 위용은 험악했다.
마지막 서북벽의 위험한 암벽지대는 쇠줄을 잡으면서 조심스레 올랐다. 저 아래 윗세오름 산장이 아스라이 보이고 영실쪽과 어리목 쪽의 산길이 가느랗게 굽어져 있었다.
드디어 정상부에 닿자마자 백록담부터 찾았다.
우유빛깔을 띤 푸른빛의 백록담이 햇빛에 반사돼 아름다웠다. 감개무량이었다.
정상부는 훼손된 자연을 회복시키기 위해 마대에 흙을 넣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나무못을 박아둔 곳이 대부분이었다. 더 망가지기 전에 정신차려 자연보호하는 국립공원이 고마울 뿐이었다.
길가엔 산림과 산길 보호를 위한 탯줄 같은 밧줄이 양쪽에 쳐져 있었다. 한라산은 예전보다 훨씬 수림이 우거져 있었다.
왼쪽으로 장구목, 오른쪽으로 왕관능의 우아한 자태를 조망하며 내리막 산길을 즐거이 걸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고 내려가는 가속도 때문에 온 물에 땀이 날 때쯤이었다.
오른쪽 길옆에 두 개의 무덤이 있었다. 단정하게 벌초된 무덤엔 야생화가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난 감전된 듯 멈춰서 머리를 숙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가슴이 아렸다. 두 후배의 무덤이었다.
그 당시 텐트 속에서 아침식사 준비하다가 별안간 내려친 벼락에 안타깝게 희생되었었다.
살아있다면 42세의 실력 있고 중후한 치과의사가 돼 있었을 텐데….
그날 집사람의 비명소리가 귀에 쟁쟁 울렸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지만 너무 가슴이 아팠다.
두 후배의 총기 있고 순한 얼굴이 너무도 깊이 가슴에 각인 되어 있은 탓이었다. 자꾸만 목이 메였다. 몇 분 내려오니 용진각 산장이었다. 제주 산 후배가 내미는 소주를 벌컥벌컥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린 가슴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하산코스는 삼각봉, 개미목, 개미등, 적십자대피소, 탐라계곡, 관음사 코스였다.
끝없이 우거진 숲 속엔 왠 시누대만 가득한지….
탐라의 비경을 이젠 볼 수조차 없었다.
모든 길은 밧줄로 막혀져 있었다.
난 시공(時空)을 초월해 후배의 기억을 더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