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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 여백이 주는 행복 이안희作


무언가 꽉 짜여진 틀
완벽히 들어찬 것
그런것들은 병적으로 싫어…

 

이 안 희
·87년 전남치대 졸
·현) 이안희치과의원 원장


아침에 출근하면서 차창을 통해 눈부실 정도의 파아란 하늘에 깔끔하게 떠있는 하얀 구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아~ 정말 예쁘다” 라는 탄성을 지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여백”을 무지 사랑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요.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잠시 들어 가다보니, 대부분의 저의 사고나 행동양식에 여백이 관련돼 있었구나..라는 느낌이 들고 무슨 대단한 답이나 열쇠라도 발견한 기분이 됐습니다.


우선 저는 여백이 많이 있는 그림을 좋아 합니다. 제가 만일 화가가 됐다면, 아마도 제 캔버스의 3분의 2이상은 늘 그저 여백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부분에 넣을 그럴듯한 그림을 구상하느라 머리를 쥐어 짰을 겁니다. 빡빡하게 들어차 있는 그림보다는 헐렁하게 들어차서 가다가 시선이 한 두군데 쯤에서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그림이 좋습니다. 하얗게 남겨진 부분이 많아 보는 이가 부득이 상상으로 채워 내야하는 그런 그림요.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한마디의 글을 올리더라도 앞뒤로 엔터키를 사정없이 쳐서 여백을 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스케줄도 그렇습니다. 숨막히게 빡빡하게 잡아 놓은 것은 아예 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환자 스케줄도 그렇고 무슨 약속 시간도 그렇고 일단은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안심이 됩니다.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환자가 많으면 어떻게 약속을 잡아서 저러지 하며 짜증이 먼저 납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감을 때까지 쉼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하나라도 더 가치 창출을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부지런한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멉니다.
해서, 하루 중 한숨 돌리고, 쉴 수 있는 여백들이 이제는 거의 고정적으로 곳곳에 미리 구비돼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아침에 모든 식구들을 내보내고, 출근하기 전까지 아무 방해 없이 음악도 듣고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며 매우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하는 혼자만의 그 시간은 제가 가장 아끼는 하루의 여백입니다. 그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저는 아마도 나머지 시간들을 보낼 때 많이 힘들어 할 것입니다.


학창시절 늘 제일 먼저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이었는데, 그 이유는 단하나 콩나물 시루같은 버스를 타는 것이 끔찍이도 싫었기 때문입니다. 헐렁한 버스를 타고 싶어서요.
아직 아무도 열지 않은 새벽안개 자욱한 자갈 숲길을 걸어 들어가며, 킁킁 대며 안개 냄새를 맡고 사색을 즐기는 그 시간이 저는 너무 좋았습니다. 이제는 내 삶의 여백으로 영원히 남을 순간들 이지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창문을 하나씩 열면서 밤새 매캐해진 교실 공기를 상큼한 아침공기로 바꿔놓을 때의 그 뿌듯함이란... 그건 여백을 사랑하는 덕에 덤으로 누리는 행운 이었구요.
같은 맥락에선지, 사람을 만나도 생김새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 미남미녀는 싫습니다.
뭔가 하나 부족한 곳을 가진-아마도 그게 제겐 여백으로 느껴지나 봅니다. - 그런 얼굴, 어딘가가 서운한 그런 몸매가 더 예뻐 보입니다.


헤어스타일도 유행에 딱 맞춰 찍어 내듯이 하는 것, 화장도 공식에 맞춰서 완벽하게 하는 것, 옷도 딱 떨어지게 완벽한 코디를 하는 것은 정말 싫습니다. 약간 허술하고, 아마추어 냄새가 나고, 여백이 있는 실루엣이 좋습니다. 액세서리도 가끔 귀, 목, 손에 다 걸쳤다가도 왠지 어색해서 꼭 하나쯤 빼어버리게 됩니다. 머리도 어쩌다 미용실에서 손질을 하게 되면 왠지 부자연스러워서 손가락을 집어 넣어서 흐트러 놓게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모임 같은 것에도 출석률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왠지 한두개 쯤, 한두번 쯤 펑크를 내야지 나머지가 잘 굴러갑니다. 10번 나가야 하는 세미나에도 무슨 일이 있을때 핑계삼아 한번쯤은 빠져줘야 나머지 시간에 더 충실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