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복된 사랑니를 빼면서
갖혀있는 자들의 고통과
연민·사랑을 키워간다…
사랑니의 출옥
가둔 자는
갇힌 자의 마음속에
오래 오래 갇혀있다
붉은 창살 속에서 몸부림치던 이십 년
사방에서 목을 조르고 팽창한 경동맥 위로
퉁퉁 부은 얼굴
누르면 누를수록 솟아 오르고 싶은 욕망
기다림은 그리움으로 기다릴 때
반가운 얼굴이 되어 돌아온다
갖혀 있고 묶여 있는 이 몸둥아리
내일 올지도 모를 님을 생각하며
오늘도 소망으로 하루를 끌어 안는다.
아침에 들어오는 창살 위에 걸린 햇살
흰 이마 위에 부딪는다.
목이 꺾이고 몸이 찢기고
두 다리가 저리도록
흔들고픈
젊음의 춤
많은 환자들이 사랑니로 고생하면서 치과에 내원한다. 환자에 따라 사랑니에 대한 애착정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어떤이는 사랑니를 어떻게 해서라도 끝까지 고수하려고 하고, 어떤이는 멸종시키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 사랑니의 치료도 치과의사에 따라 견해가 사뭇 다르다. 환자가 어리둥절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같은 사랑니에 대해서도 어느 치과에서는 그냥 두는 것이 좋다고 하고 어느 치과에서는 빼는 것이 좋다고 했다면서 우리 치과에 와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나의 사랑니에 대한 철학을 알고 싶어한다.
환자의 입안을 남몰래(?) 여기 저기 살피다 보면 사랑니가 가지고 있는 다양성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사랑니는 왜 나는 것일까? 사랑니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가? 만약 꼭 필요한 치아라면 어떤 기능이 주된 기능일까? 어떤 사람은 사랑니가 있고 어떤 이는 사랑니가 없다. 또 사랑니가 있는 사람 중에도 모두 다 있거나 한 두 개가 없거나 한다. 사랑니의 존재는 알다가도 모를 존재다.
진화론자들에게 사랑니는 퇴화되는 기관이지만, 창조론자들에게는 제1대구치, 제2대구치, 그리고 제3대구치의 시간차에 따른 맹출과 기능을 담당하는 중요한 치아로서 생각된다.
또 동양인에게는 ‘사랑니’로 불리우고, 서양인에게는 ‘지혜의 치아(wisdom tooth)’로 일컫는다. 우리에게는 사랑을 알 만큼 철이 들데 나오는 치아라 사랑니라고 불리우는 것 같고, 그네들에게는 사고의 깊이에서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고 자기의 의견을 낼 수 있는 나이에 맹출하는 치아라 해서 ‘지혜의 치아’라고 하지 않았나 가볍게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어쨌든 사랑니에 대한 이해와 철학은 문화와 민족에 따라 매우 다르게 표현되리라 생각된다.
사랑니의 발치는 사랑니의 다양한 모양과 위치로 인해 어려움을 줄 때가 많다. 특히 뿌리가 만곡된 수평지치가 하치조 신경에 가깝게 위치하면서 제2대구치의 원심면에 걸려있는 상태로 매복돼 있을 때, 그 환자의 성격까지 의심하면서 약간 긴장하며 이를 빼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랑니를 뺄 때마다 어떤 희열과 해방감을 느끼면서 환자와 함께 기쁨을 나눈다. 똑바로 나와 보려고 투쟁했던 흔적들, 앞 치아를 얼싸안고 함께 썩어가는 아픔, 얇은 뼈도 뚫지 못하고 갖혀 허우적 거리는 두 다리, 맨 구석에 있어 잘 닦이지도 않고 늘 구석지고 축축한 곳에서 계란썩는 냄새를 맡아야 하는 초라한 모습, 환한 웃음 한번 웃어보지 못하고 또 제대로 씹어보지도 못하고 치아지만 치아로서 대접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치아같지 않은 치아, 그런 사랑니를 출옥시키면서 갖는 자그마한 기쁨은 바로 이런 환경에 처한 이웃과 이런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이해에 한 발작이라도 나아가려는 몸부림이 내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태국, 중국,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우즈벡키스탄, 키르기즈스탄 등 치과라는 섬김의 도구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부끄러움을 가지고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너무나 열악한 환경과 영적인 억압 속에 갖혀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