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시사철 주문메뉴는
프림 뺀 냉커피이고
특별한 경우 아니면 꼭 참석
다방 개근상7년 전 필자가 이 곳 숯뱅이 마을(대전시 서구 탄방동)에 개업할 때만 해도, 우리 집(치과) 주변에는 치과가 둘 뿐이었다.
대전에서 가장 큰 두 신작로 중에서 계룡로라는 큰 길가이기는 하지만 뒤 쪽으로는 약간의 전자상가와 몇몇 음식점들, 그리고 지은 지 오래 된 작은 주공아파트단지가 있고, 앞 쪽 길 건너로는 술집들과 여관촌 밖에 없어서 잘되는(?) 치과가 들어서기에는 조건이 아주 좋지 않았다.
고향이 대전이 아니라서 지리에 어두웠고, 그저 대로변에 잘 보이는 위치라는 것만을 기준으로 떡하니 개업을 해버리고는 처음 나간 대학 동문회에서 많이도 혼났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선배들한테 물어 보지도 않고 어찌 그리 엄한데다 자리를 잡았냐고…. 그래서, 주변에는 점심 같이 먹을 사람이 귀해서 대부분의 점심식사는 2~3명의 직원들과 함께 했었다.
그러던 몇 년 후, 길 건너에 백화점의 왕인 롯데백화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약간(아주 조금) 활성화되고 점심밥 같이 먹을 동네 동료들이 드디어 생기게 됐다. 주변에 치과의원이 5개가 더 늘었고, 서청회(대전지역 서울치대 청년동문회의 약자인 데, 실제로 청년은 거의 없다)의 주류(酒類)인 종수형과 영진형도 공동개원을 하면서 우리동네로 이전해 오셨다. 자연히 우리는 점심식사를 같이 하게 됐고, 나는 점심시간 마다 신이나서 우리동네 맛집들을 하나 둘씩 소개하며 외로운(?) 점심시간들과 작별하게 됐다.
필자 역시 주류(酒類)인 관계로 메뉴의 절반 이상은 해장에 좋은 음식들이다. 신협직원, 보험사직원, 치과기공소장님, 책아저씨, 재료상 등등 숱한 사람들이 점심사냥꾼의 희생양이 됐지만 이들 역시 자유의 몸이 되는 순간이었다. 셋으로 시작된 우리의 점심모임이 지금은 매일매일 회식 수준의 규모가 됐다.
중구지역에 개업한 어린(?)후배 태평원장, 화이트원장과 우리 앞집의 한길원장이 합류하면서 우리들의 점심모임은 기본적으로 다섯 명이 식사하는 거대조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정겨운 점심식사 후에 우리들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다방이다. 주문 메뉴는 사시사철 프림 뺀 냉커피이고,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두 개근한다.
전국다방협회에서 개근상 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메뉴가 냉커피로 고정된 사연 또한 우리들이 주류라는 데에 기인한다. 속을 풀자니 자극적이고 매운 해장음식을 자주 먹게 되고, 땀 흘리며 먹다 보니 다시 시원한 것을 먹고 싶어지게 마련. 어쨌거나, 다방에 앉으면 오전에 어떤 환자는 엉뚱하다느니, 진료 받을 자세가 안 돼 있다느니 하는 환자성토에서부터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직원에 대한 불만 토로도 이어진다.
세상사이야기 정치이야기는 기본이고, 재료이야기나 특이한 진료테크닉과 꽁수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게 되며, 진료철학에 관계된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되도록이면 환자의 불편과 고통을 내원시점에서 차단해주는 것을 목표로 기본에 충실한 성의 가득한 진료를 하자는 것이 우리 점심 모임 멤버들의 공통된 진료철학이 됐다.
덕분에 우리는 불치의 병을 얻게 됐는데, 바로 불의를 보면 못 참는 병이다.
시대나 환자 개개인의 여건에 따라 기본에 충실한 진료가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원장 몇 년 해 보면 다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턱없이 이해불가한 진료를 해 놓는 치과의사가 간혹 우리 멤버의 입에 오르내리며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다.
타성에 젖어서 일상진료를 해 가다가도 문득 놀라며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좋은 계기가 되기도 함은 물론이다.
가족같이 애틋한 우리 점심 식구들! 오늘도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또 냉커피를 마시기 위해 출근한다. 오전진료 일찍 마친 원장님들! 한 번 놀러 오세요! ‘이 환자 빨리 보고 밥 먹으러 가야지…’
이봉호
- 90년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