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시절 이루지 못한 꿈도
환자를 대하면서 잊어가고
좋은 의사로 오래도록 남고 싶다
나의 유소년 시절의 추억을 뒤돌아보면 제일 먼저 나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자그마한 키에 곱다란 얼굴, 항상 동백기름을 곱게 바르시고 가지런히 넘긴 비녀머리에 잔잔하고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어머니께서는 그 가냘픈 몸으로 일제식민지에서의 온갖 고초와 6·25 동란으로 인한 우리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많은 심려를 겪으면서도 우리 자식들에게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신 자애로우신 어머니이시다.
이런 어머니의 고초에도 불구하고 제일 큰 형님의 어려운 고비에 항상 마음 아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아버지께서 하지 못하신 모든 가정일을 그 자그마한 몸집에 강인한 정신력으로 많은 어려움을 헤쳐나가신 어머니. 목련꽃처럼 변함이 없고 조용하며 기품있게 웃으시는 그 미소를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이시다.
유년시절 우리 집은 시골중의 시골인 아주 산골, 공기 좋고 인심 좋은 조그만 부락의 한 가구에 살고 있었다. 집앞에는 논밭에 오곡이 무성히 익어가며 그 건너편에는 영산강의 물줄기가 출렁거리며 이 영산강에서 잡아 올린 숭어와 해파리가 둥둥 떠내려가면 이 해파리를 잡기 위해 동네아저씨들이 배를 타고 고기 잡는 모습을 보면서 들어올린 숭어와 해파리를 잡아서 가까운 집에 가져와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음식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나의 영원한 미각이다.
산을 넘고 넘어 학교에 갈 때는 동네의 또래 친구들과 항상 동행했다. 그 당시에는 나는 동네꼬마 대장이었다고나 할까.
내 뒤에는 항상 여러 명의 친구들이 뒤따라왔으며 나의 말 한마디에 친구들은 꼼짝없이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이런 나의 행동은 학교에서도 제법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면서 선생님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탓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를 시골에서 보내고 광주로 유학 오는 날. 어머니께서는 쌀자루와 반찬 몇 가지를 싸주시며 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나 나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계시며 눈시울을 붉히시기도 하셨다. 광주에 유학하면서 나의 소년시절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무 연고도 없는 타향에서 혼자서 공부하려는 나의 의지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 할때마다 어미닭이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품고 감싸듯이 어머니의 그 따뜻한 온기와 한국의 전형적인 희생적인 사랑의 힘이 나로 하여금 많은 어려움을 잊게 해주는 나의 어머니의 큰 힘이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쯤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와서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남겨놓고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금과 물질만능의 급박한 상황과 급속한 흐름 속에서 우리 자신의 참모습과 진정한 자아를 잃어버리고 살 때가 많다.
극심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경쟁체제 속에서 살기위해 애쓰다보면 본의 아니게 양심과 윤리를 저버리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 온갖 부정과 비리와 범죄가 판치는 세상에서 내 나름대로 정의국가를 만들어 보겠다는 굳은 의지로 몇 번의 법과대학을 응시했으나 그 때마다 쓰디쓴 잔을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런 쓴 고배의 잔을 몇 번 마시고 나는 월남전이라는 큰 장터에 가기 위해 크나큰 배에 오르며 배위에서 거대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다시금 나의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만들기도 했다. 지나간 쓴잔의 아픔을 뒤로 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큰 기대로 월남전에서의 나의 청춘을 보내야 했다.
무사히 월남전의 군복부를 마치고 나의 대학진로의 기로에 서게 됐다. 독서실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친구와 선배의 권고에 나의 진로는 법과대학에서 치과대학의 어려운 만학의 길을 걷게 된다. 나이 들어 공부하면서 어려운 고비도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면서 조금은 허리를 펴가는 시간들도 있었다.
소년시절 이루지 못한 꿈도 이제는 환자를 대하면서 생활하고 있는 내 자신을 돌아보면 조금은 아쉬운 미련도 남지만 그렇지만 지금의 이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