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봄날은
바로 지금인지도 모른다
가장 젊은 첫 하루이니까…
오늘 아침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 앞자리에 앉은 젊은 아가씨의 화사한 옷차림을 무심코 쳐다본 순간, ‘아, 봄이 왔구나’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는 노래 가사 속 이미지처럼 여성들의 산뜻한 원색 옷차림은 봄이 왔음을 가장 먼저 알리는 신호들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사이 바람이 그리 매섭게 느껴지지 않았었고, 한낮의 햇볕은 꽤 따뜻하다고까지 생각했었는데 계절의 변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건, 내가 너무 바쁘게 살아가고 있어서가 아니라, 주변을 한번 느긋하게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가지지 못했었기 때문이리라.
누구나 계절에 대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한번 그려 볼 수 있을 것인데, 나에게 있어 봄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계절들보다는 좀더 뚜렷한 편이다. 아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 때문인 것도 같은데, 어떤 장소 혹은 어떤 풍경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기억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가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면 추억을 회상하기 위한 실마리를 제공했던 경험은 누구에게나 한번쯤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어느 해 봄날, 어른들 손에 이끌려 벚꽃구경을 따라 갔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내 눈을 가득 채웠던 눈부시게 하얀 벚꽃 이파리들이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래서 지금도 ‘봄’ 하면 온 세상이 하얀 꽃잎들로 가득한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학창시절, 한때의 봄은 매캐한 냄새와 함께 자욱한 최루탄 연기로도 기억되고 어떨 때에는 사방을 뒤덮는 황사먼지가 먼저 떠오를 때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봄은 따사로운 햇볕과 함께 만물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고 무채색이었던 온 세상이 황홀한 빛깔들로 저마다의 단장을 하고 새 생명의 기운을 뿜어내는 계절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은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한숨 섞인 어두운 이야기들로 꽃 소식이 묻혀버릴 만큼 암울하다. 자연을 누리는 사소한 기쁨조차 조금은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어수선한 이 봄, 다들 어떻게 견디고들 계신지 무척 궁금하다.
갖가지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고 나면 이번 봄은 또 저만큼 물러가고 있겠지….
가는 봄도, 가는 시간도, 가는 사람도 유유히 흘러가는 물처럼 느껴진다. 모두들 내가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이지만 무심히 흘려 보내지만 말고 아름답게 가꾸어서 기억 속에 소중하게 간직했으면 한다.
이번 주말에는 한창 재롱떨기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우리 두 아이들 손을 하나씩 붙잡고 가까운 야외로 나들이라도 가야겠다. 가서 봄 햇살을 받으며 비디오도 좀 찍어 주고 혹여 일찍 핀 꽃망울이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추운 겨울 참 잘 견뎌 냈다고 반가운 봄 인사라도 나누고 싶다.
며칠 전, 술자리에서 한 친구가 우리도 어느새 중년에 접어들었으니 좋은 시절 다 보냈다고 푸념을 늘어놓은 적이 있다. 그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 그랬듯이, 오늘이 나의 가장 젊은 날이 아닌가. 내게 주어진 남아 있는 날들 중에서 맨 앞에 놓이는 날이 오늘이니까 옳은 말이다. 내 인생의 봄날은 바로 지금인지도 모른다. 오늘이 내게 남아 있는 그 어떤 날들보다 가장 젊은 첫 하루이니까.
최홍배
- 96년 부산치대 졸
- 현)부산 해운대 패밀리치과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