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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인터뷰]윤흥렬 FDI 전 회장 세계 치과역사 신화 썼다


미국서 보장받는 교수자리 박차고 한국행
발로 뛰며 외교력 발휘…97년 FDI 유치
잇단 강대국 꺾고 회장까지 당선 이변
한국어 채택·정관개정·흑자전환 위업
“세계 이끌 도전하는 후배 많이 나와야”


그는 서울치대를 졸업하고 오슬로와 뉴욕에서 대학원을 마쳤다. 그리고 그는 한국으로 오고자 했다. 그러나 그 당시 국내 정세는 아주 안좋았다. 12.12사태가 일어나고 할 때였다. 뉴욕치대 학과장은 한국내 정세는 워낙 좋지 않은데다가 우수한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의 귀국을 만류했다.
“그러나 그 때는 한국에 가고 싶었어요. 여기서 교수하면 다시는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학과장은 나를 붙잡기 위해 조교수 자리를 주려했고 나는 거절하기 위해 부교수를 원했어요. 그런데도 그 요구를 받아 준다는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가족을 뉴욕에 두고 혼자 서울로 돌아와 생활하기 시작했을 때는 엉망이었다. 돈도 없고 살집도 없었다. 1년 정도 그는 치과의원에서 겨울엔 추위와 싸우며 먹고 자는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뉴욕치대를 유학할 당시부터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해 왔던 FDI 총회에 매년 참석했다. 그의 꿈을 위해서….


“제 꿈은 세계대회를 꼭 한국에서 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직접 FDI에 관여하고 싶다는 생각뿐 이었습니다.” 그는 그 길을 가기 위해 교수자리도 마다한 터였다. 그러기에 그는 FDI에 참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파티에 가도 끝까지 남아 자신의 얼굴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1983년. 윤 전 회장은 처음으로 영국에 있는 FDI본부를 방문했다. 당시 존 알버트 사무총장과 만나 많은 대화를 하면서 한국에서도 세계대회를 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컨벤션센터가 있냐는 등 몇가지 질문을 하고는 서류조차 주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상대조차 안하는 것이었어요. 괄시를 받으며 돌아다닐 수 밖에 없었어요. 결국 국제 사회에서는 힘을 기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힘이란 경제적인 것과 인맥 또는 지위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10년이 채 못흘렀을 때 일이다.
1990년, 그는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장으로 당선이 됐다. 당선된 첫해 FDI총회에 그가 소망하던 일을 벌였다. 싱가폴 FDI 총회에서부터 ‘코리안 런천’를 연 것이다.


그후 1991∼1997년까지는 ‘코리안 나이트’로 열다가 1998년 부터는 다시 ‘코리안 런천’으로 자리를 바꿨다. 총회A 오전회의가 끝나고 나면 각자 점심을 해결해야 했는데 그 빈 자리를 한국이 차고 들어간 것이다. 당시 대 히트였다. 각국 대표들이 빠짐없이 참석한 것이다. 지금은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각국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정도다.


코리안 런천과 코리안 나이트로 각국 대표들에게 대접을 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한국에 대한 인식이 점차 높아져 갔다. 1992년 베를린 FDI 총회, 윤 전회장은 이 당시 굳은 각오를 했다. “되던 안되던 도전해 보기로 했다”는 그는 드디어 뜻한대로 두가지 일을 해내고 말았다. 본인이 FDI 상임이사에 당선되고 그가 꾸어오던 FDI 총회를 1997년 한국에서 열게 된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날개를 달았다. 국제사회 속에서의 괄시와 멸시의 눈초리를 선망과 존경의 눈초리로 서서히 바꾸어 갔다. 그는 겸손과 끈기, 그리고 만인에 대한 열정과 성의로 이러한 일들을 해나갔다. 95년 또 한번의 상임이사 선출은 윤 전회장에게 대권 도전의 서막을 알리는 시간이었다. “당시 미국 회장과 경합을 했는데 이겼어요. 미국 대표들은 당황했고 그 후 상임이사에 나서질 않았어요.”


작은 나라, 한국은 미국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지만 예상과 달리 한국의 윤흥렬 후보가 승리했다. 그 여세는 3년 후 다시 이어진다. 1998년 재무이사 자리를 놓고 다시 미국과 경합을 했다. 또 윤 후보의 승리였다. FDI내에서 큰 권한행사를 하던 미국의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졌다. 한국에게 연거푸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신 것이다.


윤 전 회장의 행진은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