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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3)5월의 추억/김수영

 


청산도 청보리밭
바닷바람의 깊이만큼
멋드러진 보리물결 춤사위


매년 5월이면 나는 수년전 어느 소도시의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한 곳으로 돌아올 막차를 놓친 그때를 떠올린다.
그 무렵 TV프로그램중 우리나라 곳곳의 숨어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 보인 기획물중 한 편이었는데 고화질의 화면 덕도 있겠지만, 파도물결처럼 일렁이는 청보리밭의 풍경과 바람에 비벼대는 보리울음 소리에 눈과 귀가 단숨에 홀려 그 다음해 봄까지 내내 벼르고 별러서 청산도행 소풍을 나섰다.


대구에서 부산을 거쳐 완도행 버스에, 완도에서 청산도 까지는 배로 수 십 여분, 나름대로 고단한 여정이었지만 청산도의 선착장에 발을 내딛은 순간 그 고단함은 그 코끝에 싸하게 밀려드는 청산도의 흙과 바람과 보리밭 향기에 날아가 버렸다.


여행은 사전 지식의 확인이라고 했던가. 서편제의 배경에서 보았던 보리밭 언덕배기 사이에 나지막한 돌담으로 싸인 황톳길이 영화처럼 눈앞에 나타나고, 고화질 다큐의 시각과 청각을 매료시킨 그 화면 그대로 바닷바람에 일제히 파도타기를 하는 푸른 보리물결과 때로는 사각거리고 때로는 나지막하게 우우~하고 울어내는 보리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수답이 없어 계단식으로 만든 논밭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했다. 그 논밭 사이로 나지막한 아우성이라도 치듯이 춤추는 청청한 보리밭, 한 달여간 억척스레 자랐을 것 같은 씩씩하고 건장한 청년같은 보리들이 대견해 쓰다듬어 보기도 했다. 서편제에서 주인공이 딸과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던 황톳길을 따라 걸어오며 장난스레 진도아리랑을 매겨 보기도 했다.
‘사람이 살면 몇 백년 사나 ~ 개똥같은 세상이나마 둥굴둥글하게 사세~ ’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어머니가 해주신 보리밭에 얽힌 이야기들도 떠올리며 어머니가 말씀하신 깜부기가 뭔지 찾아 보기도 했지만 도통 알수 없었다.


깜부기를 솎아내던 농부가 나오는 장면에서 어머니께서 한마디 하셨다. “보리깜부리를 재를 내어 만든걸 미묵이라 하는데, 아주 옛날에는 그걸로 눈썹을 기리곤 했단다” 그 프로그램이 끝나고도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으셨다. 외삼촌과 꼴베러 갔다가 낫에 손을 베어 피가 철철나서 외삼촌과 엉엉울었던 얘기며, 그 흉터를 보여주시고, 고사리 뜯던 얘기, 보리이삭 태워 먹으면 맛있었다는 얘기… 우리들은 겪지 못한 그런 농가적 경험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애틋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다.


그런 개인적인 추억이 아니더라도 보리밭엔 이야기가 많다.
‘비단속곳 입고 보리밭 베러 간다.’
‘보리밭 밭머리만 잘 지켜도 일년 농사는 걱정없다.’ 웬만큼 키가 자란 보리밭은 워낙 깊어서 남녀가 애정을 속삭이던 장소가 되었고 그 때문에 생겨난 이야기라고 한다.
섬을 한바퀴 돌고 친구와 보리밭 사이에 드문히 섞여 있는 농가의 민박집에서 수수한 상차림을 받아 허기를 면하고 완도로 향했다.


완도도 온 김에 이곳 저곳 돌아다니다가 아뿔사, 출발전에 완도 버스 터미널에서 막차를 확인하지 않아 막차를 놓친지 10여분이 지난 후에야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고 말았다.
가까워질 듯 하면서도 더 이상 가까워지지 않던 그 친구와 어쩜 하루쯤 집에서 먼곳에서 막차를 놓치는 상황이 생기는 것도 은근히 상상했던 내가, 당장 친구와 대구로 갈수 있는 시외버스를 놓쳤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완전히 머리가 아득해져버렸다.
별수 없이 친구와 나는 완도의 현금인출기에서 거금 30만원을 찾아 소위 ‘나라시’를 타고 대구로 돌아왔다.


지금쯤은 보리가 누렇게 다 패였을까. 최근에는 청산도가 몇몇 드라마의 촬영지로 다시 인기있는 여행지로 부각되었다고 한다. 제발 그곳에 ‘OO 드라마 촬영지 세트장’ 이런 추억의 오염물 같은 것들은 들어서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코끝에 싸한 보리밭 향기가 그립지만 남도가 멀기만 한 이 곳에서는 보리는커녕 나락(벼의 경상도 방언)하나 찾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