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열심히 살았고
스스로를 수고했노라며
등을 토닥여주고 싶다
87년에 대학을 입학하고 16년만에, 서른여섯이란 적지 않은 나이에 또다시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위가 꼭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임상에서 많은 부족함을 느꼈고 늘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같은 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들에게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정체된 듯한 느낌으로 마흔을 준비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무튼 여러가지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2년반 동안의 대학원생활이 시작되었고 입학식 날의 두근거림과 설레임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얼마 전에 드디어 졸업을 했다.
‘졸업’이라는 단어 앞에서 지난 2년 반 동안 참 많은 기억과 추억이 한데 섞이어 마음이 뭉클해짐을 느낀다.
병원 원장으로 두 아들의 엄마로 그리고 아내로도 모자라 학생의 역할까지… 그랬다. 난 많은 걸 하고 싶었고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내 주변에 나의 멘토가 되어줄 만한 동기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대학원생활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숨가쁘게 놓여졌던 과제들, 저널 리딩, 파워포인트 발표, 케이스 발표, 늘 내 손에서 떠날 수 없었던 컴퓨터, 컴퓨터가 능숙치 않아 하얗게 세웠던 밤들. 컴퓨터만 잘 다뤘더라도 나의 대학원 생활이 좀 수월하지 않았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컴퓨터 좀 배워둘 걸.
지난 겨울의 40시간의 영어수업. 준비된 토익점수가 없어서 우린 토요일날 근무를 마치고 목동까지 가서 영어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일요일까지… 아, 난 뭐하고 살았지? 영어공부 좀 미리 해둘 걸. 그러면 이 겨울에 이 고생은 안 해도 될 텐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것도 아닌데. 우리 집 남자 셋의 원망어린 시선을 등에 담은 채 집을 나서야만 했는지. 하지만 그렇게 나오기가 너무 미안했지만 영어공부는 교수님의 뜨거운 열정에 신선하기까지 했다. 서점에서 영어문법책과 토익책을 고르면서 가졌던 가벼운 흥분들….
내가 이렇게 전공과목이 아닌 영어를 훌륭한 교수님께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또 다시 있을까.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강의 중에 내가 너무나 생소한 듯 한 표정을 지었더니(사실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빠듯한 강의 일정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날 때까지 어찌나 열심히 가르쳐주시던지 정말 민망했다. 아무튼 시험까지 무사히 치르고 4학기를 마쳤다.
학위를 받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논문은 쓰는 거였고 그렇게 5학기가 시작되었다. 논문 마감 시간에 쫓기는 꿈을 여러 번 꾸고 그리고 컴퓨터를 들고 일주일에 몇 번씩 목동을 드나들면서, 그리고 어떤 글을 보면 띄어쓰기가 맞게 되었는지 마침표나 쉼표가 빠지진 않았는지 엄청 민감해질 때 쯤 드디어 하드커버 하라 교수님의 허락이 떨어졌고 정말 눈물나게 기뻤다. 나의 뇌리속에 ‘논문’이란 두 글자가 사라지는 그날만을 고대하면서 잠 못 이룬 밤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힘든 적도 많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다. 우리 남편이 우스갯소리로 그랬다.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가 대학원 휴학생이라고. 뼈가 있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가족에게 미안했고 어느 한 쪽에만 올인 할 수 없어서 갈등했던 적도 있었다. 내 욕심 때문에 가족이 희생된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시기에 내 숙제하느라 제대로 챙겨주지도 못한 것 같아 남편보다는 우리 큰 애한테 너무 미안하다.
병원다니는 건 그래도 알겠는데(직장 다니는 친구 엄마들도 있으니까) 왜 학교까지 다녀야하냐고 원망하던 모습이 가슴이 아팠다. 더 나이가 들면 엄마를 이해해주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린 아들은 그저 엄마가 그리웠나보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살았을지, 더 좋은 엄마가 되었을지, 아님 우리 아들이 올백을 맞았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