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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2번째)나의 연극 입문기/박진영 포항 박진영치과의원

가장 사실적인 행위예술이며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연극은
세상의 변화에도 영원하리라

 

시골 치과의사, 개업 15년차, 지독히도 틀에 박힌 일상, 마시고 마셔도 공을 치고 쳐도 지루한 일상, 아이들 학교성적 걱정, 느슨해지는 부부관계에 대한 고민, ‘이런 게 인생인가? 내가 너무 감상적인가?’ 싶었을 때 나에겐 뭔가가 절실히 필요했었다.
“따르르릉”
“어, 선생님.”
“박 군, 내일 한 번 나와 보시게.”


약 2년 전, 평소 존경하던 고교시절 국어 선생님의 전화 한 통으로 나의 연극인생(?)이 시작되었다. 현직에 계시면서 극단의 고문을 맡고 계신 그 분과 가끔씩 식사를 할 때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대사 없는 행인 3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몇 차례 말씀드렸던 게 정작 현실이 되자, 긴장과 부담이 확 밀려왔다. 한편으론 예과 1년 시절 학과예술제 때, 엉겁결에 했었던 연극 한 편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용기를 일깨워 주었다. 낯설고 긴장되기까지 했던 새로운 시작도 막상 닥쳐보니 그 동네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인지라 그럭저럭 적응이 되고, 마침 극단이 새로 준비하는 연극에 단역으로 캐스팅 돼 약 석 달 동안 거의 매일이다시피 퇴근 하고나서 두 서너 시간의 연극연습, 끝나면 연극 혹은 연극 외적인 조언과 농담들로 버무려진 간단하거나 묵직한 술자리, 늦은 취침, 늦은 기상, 힘든 진료 시간, 또 다시 연습. 마흔 넘어서 시작한 이 일에 스스로 놀랄 정도로 열심히 하고 싶었고 그렇게 했다.
드디어 나의 첫 연극무대인, 포항연극제의 날이 왔다. 참고로, 포항연극제는 경북연극제에 출전할 포항의 대표극단을 뽑는 경연이다. 나는 처음과 중간쯤에 한 번씩 두 번 등장한다.


포항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1막 1장 첫 장면. 내가 제일 먼저 등장한다. 막 뒤에 대기한다. 객석조명이 꺼진다. 떨린다. 첫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다. 초긴장 상태의 내 심장박동은 중후한 오프닝사운드의 울림을 무시할 만큼 쿵쾅거리고, 정신은 ‘아, 내가 이 연극을, 우리 극단을 망신시키는 건 아닐까?’ 깜깜하고 아득하다. 느리게 심호흡 두 번. ‘에라, 일단 나가자.’ 무대에 올라선다. 어? 그런데, 첫 대사가 나도 모르게 나오고, 한 두 대사가 오고가니, 긴장이 좀 풀린다. 연습한대로 된다. 신기하다. ‘그래, 역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구나. 그럼 그렇지. 으하하하하.’ 극은 무사히 진행되고 어느덧 이 장면의 내 역할이 다 끝나 가나 싶을 때 갑자기 머리가 텅 빈다. 하늘이 노래진다. 머리가 순간 마비다. ‘어어, 이건 연습 때 한 번도 까먹은 적 없었던 부분인데. 어… 어쩌지? 자만은 금물인데…’ 후회막급이다. 식은땀이 난다. 어지럽다. ‘뭐든 해야 된다. 에이, 할 수 없다. 마지막 대사나 치자.’


“그래서 붓이 칼보다 무서운 것 아니겠소? 흐허하하하하….”
퇴장했다. 두 줄이나 빼먹었다. 겨우 40줄 안팎의 대사분량에서. ‘어디 벽에 뾰족한 것 좀 없나? 받고 싶어.’ 너무 화가 나고 미안하고 슬퍼지고 눈물이 나려한다.
“괜찮다. 잊어버리고 다음 장면 대본이나 더 읽어라.”
동료들의 위로가 고맙고 미안하다. 그렇게 연극은 막을 내리고, 다행히 우리 극단은 포항대표가 되었고, 다시 경북대표가 되어 전국연극제에까지 진출했다.
시간은 흘러, 지금은 네 번째 무대를 준비하고 있다.


“인생이 연극인데 그걸 왜 해?”
주위 분들이 말씀하실 때 나는 속으로 웃는다. 관객으로서의 연극은, 한 번 보고 느낄 것 다 느꼈다고 생각하는 일회성 문화상품일지 모른다. 배우로서의 연극은, 무대에서 보여 주는 것 뿐만 아니라 한 작품을 준비하는 여러 달 동안 모든 배우와 스탭이 공동목표를 향해 함께 하는 과정에서 겪는 희노애락과 인간적인 교감 같은 추억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 된 (신에게 바치는 제천의식이 연극의 시초), 가장 기초학문적인, NG없는, 가장 사실적인 행위예술이 연극이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행위욕구는 영원하기에 뮤지컬, 영화, 또는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의 틈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