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민족마다
물리적 24시간은 같지만
주관적 시간의 길이는 다르다
지난해에 보스톤에 장기연수를 갔다 올해 귀국했다. 크거나 작거나 비행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15시간 이상 구겨져 있다가 트랩을 통해 인천 공항으로 들어서는데, 참 묘한 느낌을 받았다. 낯선 땅 미국에서 3일 모자란 일 년이란 시간동안 이뤄졌던 참 좋은 많은 일들과 사람관계를 뒤로 하고 내 나라에 들어서는 순간 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아주 잠깐 그러니까 하루나 이틀 정도의 여행을 다녀온 아득한 느낌이었다.
보스톤은 달리기 좋은 곳이다. 내가 있었던 윈체스터라는 곳은 차로 5~10분 거리에 아름다운 호수와 산이 접해 있어 아침마다 동네 조깅이나 마음이 내키면 한 번 도는데 2.5마일 정도 하는 호수 둘레를 한두 바퀴 돌 수 있었다.
목요일에는 타운의 소규모 사교모임(multicultural network)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여 나이 지긋한 많은 친구들과 가벼운 친교 모임도 즐길 수 있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먹진 사람들끼리 서로의 집을 방문하고 전통음식점도 가고 모노폴리 게임도 즐기고 많은 추억들을 만들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빡빡한 서울에서의 삶이 거짓말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귀국 시 공항에서 느닷없이 느꼈던 그 생생한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물리적인 시간은 어느 정도까지 압축이 가능한 것일까?
시간이란 무엇일까? 그 정의는 그 사회의 문화에 따라 달라진다. - 캐럴 이젤
시간에 대한 개념은 그것을 측정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 - 윌리엄 앤드류즈
신은 공평하게 모든 인간들에게 하루 24 시간을 부여했다. 그러나 사람마다 민족마다 주관적 시간의 길이는 다르다. 예를 들면 같은 미주대륙이라도 뉴욕커들과 중서부의 한적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시간의 길이는 다르다고 한다. 가까운 예로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하루라는 시간을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고, 시간이 없어 하루 종일 헉헉대는 사람들도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오는 것일까? 시간 역시 다른 종류의 자극과 같이 사람의 감각기관을 통해 대뇌로 전달돼 인식되고 해석돼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각 과정마다 사람들 자신의 고유한 생물학적 문화적 특성들이 반영돼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 싶다. 매 순간 깨어 있어 시간을 느끼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봄 직한 일이다. 이것은 단지 현대사회가 그렇게나 강조하는 시간의 효율적 관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나 자신의 노력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흐르고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내 삶을 뒤돌아 보았을 때 이 지구에 잠시 여행왔던 이방인으로 지난 번 공항에서 느꼈던 비슷한 느낌을 가지지 않을까 싶다.
요즘 연말연시라서 그런지 헛되고 헛된 것으로 내 삶을 채우기에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적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