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새로운 일에 부딪히고
손해도 보고 힘도 들었지만
공보의 3년은 소중한 경험
‘낮은데로 임하게 하소서’… 2004년 훈련소 입소하면서 공보의하면 떠오르는 시골의 보건지소에서 어르신들을 진료하는 나를 상상하면서 머릿속으로 읊조리던 말이다. 하지만 나의 지난 3년을 되돌아보면 통상의 공보의 생활과는 약간 다른 생활을 했는데, 이유가 그 말 때문은 아닌가 하면서 가끔 미소짓고는 한다.
훈련소 퇴소 후 배치 직무교육을 받으며, 근 10여년 만에 처음 배치되는 교정시설에 다른 15명의 선생님들과 함게 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교정과를 수료했던 내가 한자도 같은 교정시설에 근무하게 됐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였다. 당시 일시적으로 공보의 수요 및 공급추계가 잘못돼 갑자기 배치된 결과 그동안의 관리소홀로 심지어는 미러와 핀셋조차 없는 곳도 많았다. 내가 배치된 소년수 2범 이상이 수용되었던 김천소년교도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으나 수용자들의 나이와 불우한 가정환경을 고려할 때 도리어 나에게는 마음을 잡는 기회라 생각을 해, 레진기구 등을 세팅하고 진료에 임했다. 특히나 의무과 직원들과 당시 김영수 소장님은 지금도 진하게 인상에 남아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고, 다른 세상에 눈을 뜨게된 계기가 되었다. 첫 번 교정시설 직무교육 때 다른 선생님들의 추대로 교정시설 대표를 맡게된 나는 법무부와 복지부, 그리고 각 소와 협의를 해 교정시설 치과의 세팅을 돕게 되었으며, 다음 해 전국 교정시설에 치과 공보의들이 배치되도록 힘썼고, 좋은 결실을 맺어 지금도 전국에서 많은 선생님들이 봉사의 참된 의미를 느끼며 열심히 진료에 임하고 계신다.
2년차에 올라가면서 보건복지부 공보의 협의회 치과대표를 맡게된 나는 공채를 통해서 복지부 산하기관인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들어오게 됐다. 내가 들어올 때 공공의료 20% 실현이라는 대통령 공약의 실천을 위해 ‘공공보건의료사업지원단’이라는 조직이 신설돼 ‘공공보건의료확충’이라는 과제를 위해 일하게 됐다. 배치된 후 이 분야에 있어 치과계의 소외를 알게된 나는 양승욱 변호사님과 당시 기획이사이셨던 신호성 이사님께 정보를 제공하며 조금이라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치과계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좋은 결실을 맺었다. 당시 이를 위해 구강보건사업지원단의 박종혁, 김세명 선생님과 대공협 19대 회장이셨던 황대일 선생님 등이 이를 위해 함께 힘 써 주셨으며, 이 인연이 다음 해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회장으로 출마하게된 계기가 됐다.
연차로 올라오면서 제20대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회장에 출마하게 됐다. 통상적으로 회장이 되면 이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근무하는 곳이 몇 안되는 서울 안의 근무처(노량진)이고, 의과 13명에 치과 1명 뿐인 곳이라 의과 선생들의 견제가 만만치 않았으며, 다들 편하게 진로를 준비하는 3년차 시기에 과연 내가 잘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지만, 편함을 추구하기 보다는 보람을 느끼는 삶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당시 예천에 근무하던 노원종 선생님과 함께 출마해 당선이 됐다. 항상 바쁜 일은 겹친다는 말이 맞는지 당시 결혼 등 사적인 일이 많이 겹쳐 힘이 들었지만, 공보의에게 필수적인 진료분야에 대한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세미나 확충 정책을 전임 집행부에 이어서 확대했고, 이는 약 50여회의 핸즈온 및 기타 세미나 개최, 조광덴탈의 후원으로 20여명의 공보의가 학술테마를 가지고 경연한 제1회 공중보건의사 심미수복 학술대회 등으로 이어진다. 최근 신규시장의 포화상태로 젊은 의사들에게 눈길을 돌려준 관련업체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공공보건의료 확충안의 일부로 실시된 ‘공보의 배치적정성 평가’에 관련한 경험을 바탕으로 치과공보의의 숫자가 매우 줄어들 것을 예상해 치협 국윤아 군무이사님, 경희대 예방치학교실의 박용덕 교수님과 함께 치협 주도의 ‘공보의 감소대책안’에 관한 연구를 보조하고, 공청회를 여는데 일조를 했다. 이 연구결과는 현재도 복지부에서 자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