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벽’이 인종과 관련
공적 매체에 기록이 되면
저항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오랜 시간동안 차를 몰고 출퇴근을 한다.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이제는 영종도에서 서초동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빌딩까지 운전을 한다. 지난 2월 16일에 심평원 상근심사위원 선발 합격통지를 받고 선배의 여의도 치과에서 퇴근을 해 영종대교로 차를 몰면서 일련의 지나간 일들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박사학위 논문을 위해 6, 7년 전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 청구자료(claims data)를 가지고 씨름했던 기억이며, 나의 논문을 위해 온 노력을 바친 지도교수 골드파브의 일, 2001년 9·11 테러 직후에 있었던 나의 논문발표, 그리고 ‘먼나라 이웃나라" 이야기로 유대인 비하논란에 빠졌던 덕성여대 이원복 교수가 어제 미국의 유대인 단체에게 사과한 일로 글을 써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Are you sure?" 차에서 내려 짐을 챙기던 골드파브 교수가 내게 물었다. 큰 체구를 가진 여자 지도교수님이 차 트렁크에 실어온 책을 카트에 실어서 교수 사무실로 움직이려고 하는데, 우르르 하고 책이 주차장 바닥에 쏟아져 버린다. 도와달라고 간단하게 내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상황이라면 당연히 지도교수가 학생에게 도와달라고 할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미국의 대학문화는 정말 특이하다. 골드파브 교수에게 내가 그것을 들어 드리겠다고 하니 놀라면서 “정말인가?" 하고 내게 물은 것이다. 내가 책을 들어서 따라 걸어가니 골드파브 교수가 얼굴에 미소를 띠고 너무 좋아한다. 논문발표를 준비하기 위해 교수 사무실로 가는 길이었다.
2001년 12월 15일 토요일에 소위 ‘9·11 테러"가 발생한지 3개월만에 매릴랜드대학교에서의 박사학위 논문발표를 위해 대한항공편으로 워싱턴 달러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보니 9·11 직후라서 공항의 분위기가 험악하다. 요즈음도 미국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면 허리띠까지 풀면서 몸수색을 받지만 분위기는 부드럽다. 그러나 그 때는 공항의 검색 분위기가 살벌했다. 도착한지 일주일 후 논문발표를 끝내고 다시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정밀 몸수색을 당하던 그 때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무작위로 승객을 검색한다는데 하필이면 내가 왜 추가적인 몸수색을 당해야 했는지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서울을 떠나기 전에 지도교수 골드파브가 논문발표 준비와 마무리를 자택에서 하라고 편의를 제공해 숙박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달러스 공항에서 차를 렌트해 매릴랜드 실버스프링의 골드파브 교수댁으로 운전해 오후 일찍 도착했다. 경제학 교수 부부의 영접을 받아서 게스트룸에 짐을 풀고 일주일간 지내게 될 이 집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비행기 안에서 발표자료를 리뷰하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했는데, 낮잠을 좀 자고 일어나라고 반가운 말씀을 해 2시간 정도 깊은 잠을 자고 일어 났다.
잠에서 깨어나 보니 햇볕은 따뜻하게 실내를 비추는데 집안에는 조금 우울한 기분이 감돌았다. 정신을 차려 출입구가 있는 식당으로 가보니 골드파브 교수가 식탁에 촛불을 켠 채 묵상을 하고 있었다. 7개의 초가 나란히 꽂힌 작은 촛대에 불이 켜져 있었다. 오늘은 골드파브 교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라서 추모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 촛대의 모양을 보고 나는 처음으로 이 분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1994~1996년도에 학위를 위한 코스웍을 밟을 때, 까만 빵모자를 쓴 유대인 학생들과 골드파브 교수의 경제학 강의를 듣곤 했지만 이 분이 유대인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3일 후 12월 18일, 이날은 내게 무척 감격스런 날이다. 박사논문을 마지막으로 발표를 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골드파브 교수댁을 나서면서 오늘의 디펜스는 성공적이라는 걸 알았다. 논문심사위원회 체어로서 아마도 내 논문을 통과시키기로 결심을 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