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도시에서도
희망과 생명의 계절인 봄은
마냥 설레고 기다려진다
높고 낮은 시멘트 건물들로 꽉 차버린 도시는 온통 잿빛이다.
크고 작은 공장이나 빌딩들의 굴뚝에서 내뿜는 연기도 회색빛이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자동차들도 도시의 하늘을 잿빛으로 물들이는 주범들이다.
보도블록과 아스팔트와 온갖 오물들로 뒤범벅이 된 땅마저도 회색빛이고 수많은 고가도로나 육교마저도 회색빛이다.
회색빛 아파트와 회색빛 담장으로 둘러 쌓인 주택들, 을씨년스런 나목의 가로수나 빌딩숲 사이로 보일듯 말듯 한 먼 산들도 회색빛이고 지하도나 지하상가의 벽마저도 어김없이 회색빛이다.
이런 회색빛 속에서 우글거리고 북적대는 도시 사람들의 마음마저도 어쩌면 회색빛인지 모르겠다.
잿빛 도시의 환경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맞이한다는 것이 도무지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는 몰라도 사람마다의 가슴속에는 역시 봄을 그리는 애절한 마음이 숨어 있는듯 하다.
물가의 버들가지나 연두빛 새싹의 수양버들, 노오란 민들레나 자주빛 할미꽃, 종달새 높이 떠서 우짖고 아지랑이 하늘거리는 두고 온 고향을 생각해서도 봄은 역시 기다려지게 마련이다. 봄만 되면 보릿고개에 고픈 배를 움켜 쥐어야 했던 서글픈 추억을 간직한 이에게 마저도 역시 봄은 희망과 생명의 계절이란 점에서 마냥 기다려지는가 보다.
점점 각박해 지고 인정이 메말라 가는 도시에서도 주택가 회색빛 담장위의 철조망 사이로 피어 오른 하이얀 목련꽃이나 노오란 개나리꽃을 훔쳐 보며 봄이 온 것을 경이롭게 확인하게 된다. 또한 고갯길 벼랑이나 아파트앞 어린이 놀이터에 핀 개나리꽃을 보거나 길가에 내놓은 네모난 화분에서 보라빛 팬지꽃이라도 보게 될때 봄을 알고 넘긴다는 자부심을 갖는 것이 도시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게다.
그도 저도 아니면 화려하게 인쇄된 캘린더에서 매화꽃, 철쭉꽃, 진달래꽃, 개나리꽃, 벗꽃들이 만발한 좋은 경치를 감상함으로써 봄을 맞고 안기고 보내는 것이다. 도시에서야 한겨울에도 꽃시장에만 가면 온갖 꽃을 다 구경하고 살수도 있어서 꽃을 가지고 봄 운운 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을런지는 몰라도 거리를 오고 가는 젊은 여인들의 옷차림에서 봄을 느끼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아마 계절감각이 무딘 사람일게다.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 대는 분수나 거리를 바삐 오가는 이삿짐 트럭에서도 봄을 느낄수 있고 ‘봄맞이 거리 및 교통질서 확립운동’이라고 써 붙인 현수막에서도 봄을 느낄수 있다. 식탁 위의 산나물이나 냉이국에서 봄의 향기와 맛을 느낄수 있고 이웃집 창 너머로 새어 나오는 ‘봄처녀’ 가곡이나 ‘봄의 교향곡’을 들음으로써 봄을 느끼게 된다.
아무리 감각이 무딘 사람이라도 점심후에 사르르 졸리운 춘곤증을 통해서 봄을 몸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그 옛날 3·1절이나 4·19의 함성으로 하여 새 시대, 새 역사 창조의 정치적 사회적인 봄을 생각하게 하는 도시인의 봄은 식목일이나 한식이나 청명절이라는 일력적(日曆的) 감각보다 더 진하디 진한 봄일게다. 이렇듯 온갖 잿빛으로 뒤덮인 도회지에서 이렇게나마 봄을 느끼고 사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