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옷이 탐이 나서
가설극장 화장실로 끌고가
옷을 벗겨 가지고 줄행랑 쳐
나에게는 고향이 없다.
서울에서도, 그것도 종로 한 복판에서 태어나 자란 죄로 개발이 내 고향의 모습을 일찍 다 앗아가 버렸다.
초등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에 이미 흙 땅이 없어지고 보도 블록을 까는 바람에 흙 땅에 구멍을 뚫고 하는 구슬 놀이를 할 수가 없어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원정을 갔던 불편함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고향의 추억만은 생생하여 가끔 모임이 있어 종로 거리를 활보하다 보면 옛 일들이 하나씩 내 머리 속에 떠오르고는 한다.
“신난다, 신난다, 신신 백화점. 화난다. 화난다 화신 백화점."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이 노랫말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곤 했다.
노랫말처럼 화신 백화점의 분위기는 우중충했으나 그때 우리를 끄는 매력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엘리베이터라는 괴물이었다.
별다른 놀이 기구가 없던 시절의 애들에게는 정말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에서 꼭대기 층까지를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백화점 측에서는 이 반갑지 않은 꼬마 고객들로 너무 번잡하여 장사에 지장이 있는지 드디어 엘리베이터 감시 전담 경비까지 두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경비 아저씨와 꼬마들의 투쟁은 치열했다.
그 아저씨가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냐마는 목구멍이 포도청인 관계로 감시가 아주 엄하여 우리는 새로운 방법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2층으로 몰래 잠입을 하여 거기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방법이었으나, 또 금방 그 경비 아저씨는 이에 대한 대처를 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놀이라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으며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이 머리 싸움은 계속되었다.
화신 백화점에서 종로 1가 청진동 쪽으로 길을 건너면 신신 백화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별로 높지 않은 2개의 빌딩이 세워져 있었고 그 사이에는 높다란 반투명의 지붕을 얹어 그 안에 들어가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일종의 스테인드그라스로 지붕을 만들어졌고 그 가운데는 대형 수족관이 있어 아름다운 금붕어들이 오락가락하였다.
여기서 몰래 낚시를 하다가 백화점 직원들에게 봉변을 당했던 일도 떠오르지만 글의 주제와는 먼 것 같아 생략하고 신신 백화점 뒤쪽의 공터로 가보자.
이 곳도 나중에는 ‘소아낙원" 이라고 하여 돈 받고 태워 주는 놀이 기구들로 꽉 차게 되었지만 그 시설들이 자리 잡기 전에는 가설 극장이 서던 곳이다.
엄마 따라, 할머니 따라 또 네분의 고모들을 따라 지겹게 들어 가 본 곳이지만 그 가설 극장 안에 대한 별다른 추억거리는 찾아 낼 수가 없다.
그러나 거기서의 공연이 다 끝나고 늦은 시간에 커다란 천막 사이를 들락이며 놀던 일이 마치 어제의 일 인양 새삼스럽다.
그 날도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서 놀다가 귀가하는데 제일 어린 철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할 수 없이 우리끼리만 돌아오게 되었는데 밤 10시가 되어도 오지 않아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마침 어른들이 동원되어 찾아내게 되었고 동네 아저씨가 철이를 업고 오는데 철이의 모습이 완전히 홀딱 벗겨진 상태였다.
요즘 말로 유괴범의 소행이었다. 아이의 옷이 탐이 나서 가설 극장 화장실로 끌고 가서는 옷을 벗겨 갖고 줄행랑을 친 것이다.
철이는 옷이 완전히 벗겨진 상태인지라 창피해서 얼른 집에 가서 어른들에게 이를 수 없다는 고도의 치밀한 계산이 깔린 범행이었고, 그 당시 나에게는 끔찍한 사건이었으나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유괴범의 소행이 그렇게 귀여 울 수가 없다.
그 때 그 사건이 홀딱 벗겨진 어린 철이에게는 괴롭고 추운 이야기이겠지만 내 어린 시절 추억 속에서는 유괴라는 것도 지금과 비교하여 마냥 따듯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