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했다고 사과하면 그만 때릴 것 같았지만 나는 억지로 이를 꽉 물고 더 반항아 기질적인 복수의 눈빛으로 오히려 선생님을 노려봤다.
거의 일년동안의 내 방황을 보다 못하신 아버지께서 다음 해에 고등학교에 들여보냈다. 그렇지만 나는 별로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농구나 배구 등으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수학 시간에 선생님의 질문에 마음이 비뚤어진 내가 엉뚱한 농담 비슷한 대답을 하여 동료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업 시간에 야구 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잘못했다고 사과하면 그만 때릴 것 같았지만 나는 억지로 이를 꽉 물고 더 반항아 기질적인 복수의 눈빛으로 오히려 선생님을 노려봤다.
나를 너무 때려서 오히려 선생님의 휘둘렀던 팔이 아파서 더이상 나를 때릴 수가 없어서야, 나는 그 심한 매질에서 해방이 됐다.
계속해서 수업 시간이 이어지는데도 나는 책가방을 그냥 교실에 놔 둔 채 학교를 나와 버렸다.
주머니에 돈이라도 있어서 시원한 팥빙수라도 마시면 육체적으로나마 시원할 텐데 먼지만 있는 주머니에 양손을 푹 찌르고 뒷산 언덕진 풀밭에 하늘을 향하여 드러누워 부르짖었다.
나에게 어머니를 돌려 달라고 외쳤다. 그렇지 않아도 서러운데 이럴 때일수록 더 어머니가 보고싶고 선생님께 맞은 아픔과 섞여가면서 나의 감정은 주체할 수가 없어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울음과 원망과 그리움에 젖어 다시 어머니를 크게 부르고 있었다.
바다 건너 아주 멀리 계신 어머니가 들리실리가 없지만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나의 분을 삭일 수가 없었다.
이럴 때에 어머니가 계시면 나를 얼싸안고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고 등어리를 어루만지면서 나를 무척 위로 해 줄 텐데 하면서...매 맞은 상처의 아픔보다, 서러울 때 옆에서 위로해 줄 포근한 어머니가 없다는 것이 서러워 아무도 없는 산자락에서 아주 오래 동안 엉엉 울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풀벌레 소리와 아름다운 새 울음소리에 부시시 일어나 보니 벌써 어둑컴컴해졌다.
흙먼지를 일부러 내면서 떨어진 운동화를 질질 끌고 힘없이 내려왔던 슬픈 추억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머니께서 육성으로 녹음된 테이프를 인편을 통하여 내게 전해 왔다.
“찬택아!”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벌써 눈물이 가로 막혀 그동안 억지로 참아왔던 울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어머니께서는 한국 말 발음을 잘 못하셔서 내 이름을 이렇게 부르셨다.
그 때 어머니께서 약속을 하셨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올바른 학생이 된다면 어머니와 같이 살 수 있는 길이 빨라 질 수 있다는 격려의 말씀이 계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그동안 정신을 딴 곳에 팔렸던 마음을 제자리에 돌리기 시작했고 다른 친구들 보다 때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어머니께 기쁨을 드리고 오로지 어머니와 같이 살고 싶은 마음에 나의 공부에 대한 열기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어렵게 대학을 입학하여 나는 어머니와의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내 할 바를 충실히 해 나가기 시작했다.
내 등록금을 내 주시는 아버지는 아직도 빚 보증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셨고 당연히 어머니와의 해후도 해만 넘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꿈에 그리던 어머니와의 만남이 이루어 졌다.
내 졸업식에 오시면서 8년만에 만나게 됐다. 8년만에 오신 어머니는 지병으로 몹시 허약하셨고 의료 보험이 없는 한국에 어머니의 병환을 고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겨우 이틀을 보내시고 다시 병환 치료차 일본으로 가셨다.
나는 바로 군에 입대해 군 임무를 마치고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서 내가 돈을 벌어 꼭 어머니의 병환을 고쳐 드리고 싶었다.
군대에 들어가면서 내 수중에 돈이라는 것이 드디어 들어오게 됐다.
나는 내 손으로 어머니와의 못 다한 상봉을 추진하려고 군대 봉급을 모아 적금을 들기로 했다.
당시 국제선 항공료는 내가 비록 육군 중위의 봉급이지만 단숨에 항공료를 내기는 무척 어려웠다.
거의 일년에 걸쳐서 적금을 붓고 나니 항공료 값이 됐다.
그러면서 어머니와의 해후를 좀더 가치 있게 보내려고 어머니의 모국어를 내가 배우기로 했다.
졸업식 때에 잠시 만났을 때 어머니는 그나마 조금 알고 계셨던 한국말을 많이 잊으시고 계셨기에 내가 어머니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훨씬 빠르겠다는 판단이 섰다.
다행히 대구 시내에 가까운 곳에서 제대 말년기를 보내게 되어 일본어를 배우기에 아주 좋았다.
다행히 장교로 근무하게 되어 퇴근 후에 시간이 있어서 거의 일년을 빠짐없이 학원에 갔다.
몇개월의 공부로 학원 선생님의 도움을 곁들여서 나는 최초로 어머니께 편지를 띄웠다.
나는 일본말을 모르고 어머니는 한국말을 모르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