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통제를 상실하면
아이들은 집안의 황제로
부모들을 신하로 부린다
“우리 애 좀 야단쳐 주세요.” 이것은 치과에 온 구환 어린이의 엄마들이 자기 아이의 양치질 소홀을 탓하며 치과의사가 교육을 강화해 달라는 주문의 말이다. 임상 경험이 많건 적건 치과의사들이 한 번쯤은 들어보았음직한 말이고 특히 어린이를 많이 진료하는 사람들은 매우 흔히 듣는다. 나는 이 말을 들을 때 간혹 웃으며 이렇게 대꾸한다. “어머니, 제가 왜 애기를 야단칩니까? 저는 이 아이와 평생 친구가 되어야 하는데… 악역을 맡기는 싫은대요.” 그런데 곰곰이 되씹을수록 이 말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다.
과연 어머니의 주문대로 어린이를 야단쳐 이를 잘 닦도록 만들 것인가? 하기야 환자 교육도 의료인의 기본 사명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그러나 여기엔 묘한 차이가 있다. 과연 이 엄마는 우리가 교육해 준대로 정말로 집에서 아이의 양치질을 고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본 것일까? 아니면 아무런 노력을 해 보지도 않고 다시 내원한 것이 미안하고 선생님께 비난받을 것이 두려워 미리 방패를 치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할 일을 잘 못 하겠으니까 치과의사 선생님이 대신 해 달라는 의미라면 이것은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다. 부모의 역할과 의사선생님의 역할은 다르다. 즉 이 말에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식의 통제가 어려우니 선생님의 권위를 동원하여 어린이의 습관을 바꾸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물론 부모와 의료진이 아이의 생활방식을 바꾸는데 협력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부모의 역할을 의료진이 대신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요즈음 젊은 엄마들의 육아방식은 과거와는 매우 달라진 것을 목격한다. 그 중 가장 우려스러운 형태는 자신의 자식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였거나 포기한 경우이다. 핵가족화, 소자녀화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 소자녀 호화주의이고, 그 결과 양육의 삼박자인 애정, 인정, 훈육의 균형을 상실한 비정상적 양육패턴이 증가하고 있다. 삼박자의 마지막 것이 약화되었거나 상실된 집안의 아이들은 집안의 황제로 즉위하여 부모를 신하로 부린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심지어 의료기관에 와서도 이런 아이와 엄마들은 그 행태를 유지하려 해 많은 충돌을 불러일으킨다. 학교에서 놀다 다쳐 치아외상을 입고 응급성으로 내원한 경우, 학교 담임선생님과 가해 어린이의 엄마는 중죄인이 되고 다친 아이의 엄마는 마치 빚쟁이나 재판정의 원고와 같은 행태를 보이는 데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들이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을 가지고 뭘 그리 심하게 하시나요?”라는 말은 멱살 잡힐 것이 두려워 차마 내 입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신의 아이에게는 최대한 관대해 모든 것을 다 수용하고 왕처럼 받드는 반면, 자식에게 가해지는 어떠한 외적 제약이나 불이익도 참지 못 하는 외강내유의 전형들이 많다. 치과에 최초 내원단계에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과도기적으로 부적응적 행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그 대다수는 의료진의 단계적인 심리적 접근에 의해 쉽게 적응된다. 그러나 이 문제아의 문제모들은 특이한 반응을 보이는 수가 많다.
“저는 아이가 우는 것을 못 보겠어요. 아이를 좀 안 울리고 치료할 수 없나요?”
“아프니까 아이가 우는 것 아니겠어요? 좀 안 아프게 해 주세요.”
“우리 아이는 강제적으로 윽박지르면 안 돼요. 제가 꼭 옆에 있어야 해요.”
“얘는 집에서 한번도 큰 소리 듣지 않고 자랐어요.”
발버둥치며 우는 아이의 주머니에는 치과에 끌고 오는 길에 쥐어준 만원 짜리 지폐가 삐져나와 있고 양손에는 장난감과 음료수가 들려져 있다. 그런데도 이 아이는 울려서는 안 된단다. 이 아이는 특수한 아이란다.
요즈음 각급 교육기관의 종사자들은 학생들이 달라진 것으로 보고 흔히들 전단계 교육과정이 부실하다고 탓한다. 교수들은 대학 신입생들의 학력을 탓하며 고등학교 교육을 나무란다. 그러나 사실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