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참되고 더 진실하고 더 낫게
진화하고자 하는 소망이
내 안에 있다
찻물을 끓인다. 한꺼번에 서너 가지 생각이 뒤엉켜 도무지 풀릴 기색이 안보이거나 스스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 나는 가끔 홀로 찻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는 찻물이 끓는 동안 서둘러 머릿속을 송두리째 비워간다.
가을로 접어들어 선선해질 무렵이면 감잎차를 즐겨 마신다. 언제부터인가 감잎차의 맛을 좋아하게 되었다. 잘 만든 감잎차는 열탕으로 우릴 때 그 은은하고 다정한 맛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차를 마시는 동안 나는 오직 나만을 만난다. 스스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본다. 피로로 지친 몸을 쓰다듬어주고 상한 마음도 달래준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존중하고 있음을 확인해 간다.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동안 마음은 다시 평온해지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다시 건강해짐을 느낀다.
나는 따로 시간을 정해 기도하거나 명상을 즐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차를 마시면서 나와 만나는 시간을 갖고 나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비록 내가 선택한 길이 좁고 험난한 길일지라도, 그 길은 내가 가야할 길임이 더욱 분명해지곤 한다.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짧고 유한하며 시간은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할 수 있어 행하는 것과, 할 수 있으나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분별하는 것이 삶을 헛되이 하지 않는 지혜이나 그것은 자기를 아는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일에 대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고 뒤엉키는 건 대부분 과욕 때문이리라. 그러나 실상은 그 과욕이라는 것도 小貪大失에 불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공자도 이를 염려하여 君子三戒의 마지막 덕목으로 삼았지 않았는가.
空手來空手去, 참으로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다. 나의 처절한 삶의 몸부림도 언젠가는 타오르던 캠프화이어의 불이 꺼지고 서러움이 밀려오듯 파닥이다 어디론지 사라질 것이다. 혹자는 묻는다. 무엇을 얻고자 그렇게 애태워 밤을 새우는가? 무엇이 그대를 그토록 높은 산에 오르게 하는가?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한다. 그러한 치열한 삶의 몸부림들이 무수한 인류 眞化의 한 과정에 있다면 그 자체가 나의 삶의 의미인 것이라고. ‘치열한 삶’은 바로 무수한 역사의 점들 속에 전혀 새로운 ‘나’만의 점을 찍기 위한 표현일 뿐이며,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짜릿한 기쁨이며 희열인 것이라고.
과거 어딘가에서 ‘내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로부터 꽤 여러 해가 지났다. 기적으로 친다면 그동안 나에게 여러 번의 기적이 더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좀 다르게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기적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실어준 ‘긍정의 힘’이었다. 그 사이 나는 내 막강한 지지자인 어머니를 잃었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절대적 믿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집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큰 당신의 별이 졌다’며 위로랍시고 염장을 질렀지만, 나는 확신했다. 비로소 내 어머니는 내 안의 무수한 별로 새롭게 뜨고 있다는 것을. 나는 천성이 단순하다. 일단 결정하면 좀체 한눈을 파는 법이 없다. 구지 득과 실을 따지지 않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바를 행해왔다. 천성이 그러하다 보니 다른 중요한 부분들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놓쳐버리는 우를 범할 때가 많았을 것이다. 그로인해 몇몇 아끼던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길을 가려할 때 많은 분들이 여전히 나를 믿어 주신다. 근래 들어 함께 가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에너지로 나를 지탱해주고 있는지 자주 느끼고 있다.
나는 인류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근원적으로 인류는 진화하고자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더 참되고 더 진실하고 더 낫게 진화하고자 하는 소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범우주적 비밀을 떠올려보자.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가장 몰두하는 대로 이루어져 가고 있다. 즉 역사는 내가 진실로 생각하고 믿고 행동하는 바대로 움직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