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원에 느낄수 있는 행복감이
2만원을 가졌다고
결코 두 배가 되지 않는다
사막을 헤메던 거지에게 요정이 나타났다. 가진 것도 없고 굶주린 거지를 위해 요정은 그의 빈 자루에 금은 보화를 채워주기 시작했다. 자루가 다 찬 후에도 요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거지는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쳤다. 무게를 못 이기고 자루가 터지자 금은 보화는 모두 먼지로 변하였다.
어릴 때 읽었던 우화인데, 그 때 당시에는 어린 마음에도 이 거지의 어리석음을 얼마나 탓하였는지 모른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것이 없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어느 순간에 ‘그만"을 외치고 이미 가득한 금덩어리만을 가지고도 여생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탐욕이란 어찌하여 끝이 없는 것일까 라면서. 그러나 지금 시점에 이 이야기를 접하고서는 나 자신이 과연 이 거지처럼 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을 떨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가진 사람이 더 가지려 하고 또 더 가지려 노력하지 않는 것을 죄악시하는 사회가 아니던가.
발전이니 개혁이니 하는 이름으로 치장된 인간의 모든 활동들은 근본적으로 더 나아지려 하고 남들보다 앞서가려 하는 몸부림이다. 나아가서 좋은 집, 좋은 옷을 차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소유욕을 넘어서서 조금 더 갖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듯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다른 어느 세상보다도 정보와 심지어 감성의 전염성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남들과 조금 동떨어져 살려는 것이 만만하지는 않다며 자신의 소유욕구에 대한 합리화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서도 겉으로는 감동하며 속으로는 ‘스님께서는 속세를 초월하여 계실 수 있으니 그런 마음 편한 말씀도 하십니다’라며 반 비아냥거릴 심보이다. 또한 부자 동네의 목사님은 ‘돈 많이 벌고 성공하여 주님께 영광돌리라" 하시고 그렇지 않은 동네의 목사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당가리라" 하시니 일천한 신앙심으로는 이것도 역시 혼란스러운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정상적으로 가족을 이루며 매달 생활비와 국가를 위한 세금을 또박또박 내면서 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가장들에게 무소유를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라며 공허하게 외쳐본다.
주위의 능력 좋은 동료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노릇이지만 되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10년 전 혹은 20년 전의 나보다는 분명히 많이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재물을 소유함으로써 느끼는 행복감은 유효기간이 짧고, 또한 내성이 생기는 것 같다. 돈 1만원에 느낄 수 있는 행복감이 2만원에 이르러서 결코 두 배가 되지는 않는 것이다. 대신 2만원을 소유하니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하물며 ‘아주 많이" 소유한 사람들의 불안감은 어떠할 것인가 상상해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별로 불안해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면 어쩌지…? 하는 이율배반적인 불안감이 또한 엄습한다.
후후.
손가락 끝에서 모든 것을 나에게 제공해주는 인터넷과 휴대폰이 없으면 망망대해에 고립된 느낌일 것 같지만 실제로 이것들을 잠시 멀리 하는 순간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가족과 친구들이 다가온다. 이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가졌으며 또 가지려고 계속해서 애쓰면서도 소유에 연연하지 않는 워렌 버핏의 가치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하고자 노력하는 것과 소유한 것들을 영원히 움켜쥐려고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전자는 미덕일 수 있지만 후자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 또한 소유한 것들을 놓아준다고 하여 궁극적인 불소유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크게 버리는 사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 맞아. 이제 이런 생각은 그다지 소유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해서도 너그러워 질 수 있는 구실이 된다.
그래, 어느 순간 무소유도 가능하고 그런 상황이 되어도 허탈하지 않을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생각 속에서 그다지 많이 소유하지 못한 우리 세대의 변변찮은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