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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수필(816)>
나의 사랑하는 라면
김범수(UCLA 치과과정 수료, 현재 LA에서 개원중)

어떤 사람에게는 부식거리인 라면 한 봉지가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굶어죽기 직전의 마지막 가난한 양식이 되기도 하리라.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쯤 해서 난생 처음 라면을 먹어 보았다. 하루는 학교에서 철봉도 하고 공도 차고 여자아이들 고무줄도 끊고 실컷 놀다가 허기져서 집에 돌아오니 순이 누나가 “너 이거 한 번 먹어볼래?”하면서 국수를 한 그릇 끓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라면이었다. 그전에 먹어본 국수가락의 밋밋하고 흐물해진 맛에 비해서 그 ‘라면’이라는 새 국수는 내 입맛에 혁명을 일으켰다. 쫄깃쫄깃하고 꼬들꼬들하면서도 호로록 입에 들어오는 그 맛은 이 세상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뿐인가 그 동안 순이 누나가 만들어준 국수장국은 닝닝한 멸치 다시 국물에 먹기 싫은 호박과 파 같은 것이 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 혁명적 국수는 매콤하면서도 맛좋은 국물 안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아! 사랑스런 라면이여! 나는 그날부터 학교에 갔다오는 대로 책가방을 내동댕이치고는 순이 누나의 즉석라면을 한 그릇씩 해치웠다. 이후로 학교에는 생라면을 봉지째 가져 와서 오두둑 오두둑 과자처럼 씹어먹는 애들도 생겼고, 그 인기에 편승해서 약간의 단맛을 가미한 ‘라면땅’이라는 아이들용 과자도 날개 돋친 듯 잘 팔렸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라면과 첫인사를 나눈 뒤 중·고등학교 시절과 재수시절, 대학 시절을 통틀어 나는 라면과 함께 시험공부도 했고 라면과 함께 캠핑도 갔다. 나는 지금도 라면을 잘 끓인다. 인스턴트 음식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끓이면 절대로 라면의 참맛을 낼 수가 없다. 라면이야말로 불 조절에 그 비법이 숨어 있는 소위 ‘불의 요리’이기 때문이다. 6년 전 필자가 싱글이었을 때 새 콘도를 사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사귀던 아가씨(지금의 내 아내)가 보온병에 아이스티를 만들어 와서 무빙 컴퍼니(Moving Company)일꾼들과 필자를 겪려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넉살스러워 보일 것을 걱정했는지 금방 자리를 뜨려던 새침데기 아가씨는 군데군데 박스와 옷가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을 보고는 하나둘씩 치우기 시작하다가 그만 점심도 놓치고 서너 시가 넘고 말았다. 혹시나 하고 부엌 쪽에서 옮겨진 박스 하나를 뜯어보니 그안에 나의 유일한 부엌 살림인 냄비 하나와 라면 두봉지가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삿짐 박스들을 발로 밀어 버리고 곧바로 냄비에 물을 올려서 라면을 끓였다. 한 사람은 냄비째, 또 한사람은 뚜껑에 담아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먹어치웠다. 이날의 라면 맛을 아내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고, 은근히 내가 부엌일을 좀 도와주었으면 하고 바랄 때마다 말하곤 한다. 며칠 전, 한국에서 IMF로 실직당하고 빈손으로 이곳에 온 한 부부의 아파트를 방문하게 되었다. 물론 영주권도 노동허가서도 없는 관광객 신분으로서 한국에는 연로하신 부모님과 초등학생인 두 아이들을 남겨둔 채 일자리를 찾아보려고 온지 6개월이 되어간다는 얘기였다. LA에도 이런 곳이 있었나 싶게 좁고 어두운 아파트, 허물어져가는 더러운 복도 끝에 달린 아파트 안에서 두 부부는 낡아빠진 카펫 바닥에 냄비 하나를 놓고 아침식사중이라 했다. 힐끗 들여다본 냄비 안에는 불어터진 라면이 반쯤 담겨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당신이 마저 먹으라며 냄비를 이쪽으로 밀었다가 저쪽으로 밀었다 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가 언젠가 빠른시간 안에 일자리를 얻고 자리를 잡게 되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준비해간 나의 작은 성의를 전달하고 왔다. 어떤 사람에게는 부식거리인 라면 한 봉지가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굶어죽기 직전의 마지막 가난한 양식이 되기도 하리라. 그리고 그런 세상살이의 양지와 음지를 나의 사랑하는 라면은 알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