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버 지 / 오교창 인천강화읍 오치과의원 원장
십 수년간 ‘동거 ’를 통해
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준 아버지
아버지는 지금도 내안에 살아 계신다
치과의사들의 직업에 대한 만족도가 5점 만점에 3점 이하로 최하위권에 속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자식들이 대를 이어 주기를 희망하는 치과의사들이 많은 것을 보면 선망받는 직업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법관이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나 역시 그렇게 치과의사가 되었고, 어느 순간 내 고향 강화에서 아버지와 함께, 아니 아버지의 페이닥터로 치과인생이 시작되었다.
본과 2학년 때였던가 치과개원을 하고 계신 아버지를 둔 개업을 앞둔 선배의 단호한 한마디가 그 후로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니?"
치과원장으로서 보다는 강화의 원로로서, 오피니언 리더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던 아버지와의 개원생활에 적응하기에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정신없이 환자들이 몰려도 꿋꿋이 전치부 6-unit 브릿지를 제거하시고는 ‘Lunch!" 한마디를 던지고 나가시는 뒷모습을 야속하게 바라보며, 레진 템퍼러리 브릿지를 만들며 점심을 건너뛰어야 했다.
내가 기억하는 ‘런치"와 등가의 단어들, ‘배쓰룸", ‘바버숍? 등은 그때의 힘든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공보의 때의 수입보다 적은 월급봉투를 받을 때의 기분은 친자확인을 위해 유전자 검사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공휴일까지도 진료를 해야 했고, 명절 때는 줄서있는 친척들을 위생사도 없이 혼자 보느라 진땀을 빼고… 그러면서도 아버지로부터 큰 혜택을 받고 있다는 주위의 시선은 더욱 나를 힘들게 했고, 몇 번이고 이 자리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처음 몇 년은 그렇게 아쉬움, 야속함, 불만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좁은 원장실에서의 부자간의 긴 동거는 차츰 다른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나를 인정하고 의지하는 모습을 보며 묘한 성취감과 소명감이 자라나고, 시시콜콜한 주변이야기부터 정치나 종교이야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은 넓어져 가고, 어머니와는 또 다른 아버지의 사랑을 온 몸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치과의사라는 같은 직업을 가지고 공통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부자의 이러한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다.
가장 보람된 기억은 2000년, 많은 강화 분들의 관심 속에 진행된 오치과 개원 50주년 기념행사 때였다. 일제시대 때 경성치전을 나오신 작은 할아버지께서 개원을 하신 것으로 따지면 우리 집안의 강화에서의 치과개원 역사는 더 오래지만 아버지의 반세기 치과인생이 자랑스러웠고, 나로 인해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갈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이 더했다. 그 뒤 60주년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바람은 53년으로 마감이 되고 2년여의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 때의 상실감은 글로 표현하기 어렵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나의 일상속에 젖어있다.
구환차트의 아버지의 글씨에서, 몇 십년 된 덴쳐를 보며, 막내아들을 무지 사랑하시는 어머니의 눈에서…. 어느 날인가 강화출신의 생면부지의 노인분이 고향을 찾아 오셔서 우리 치과를 방문하셨을 때 기다리는 환자들을 뒤로하고 원장실에서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불현듯 나에게서 내가 아닌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아버지는 지금도 내안에 살아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십수년 간의 동거를 통해 내게 부족한 것을 아버지의 한 부분으로 채워 주신거였다. 많은 강화 분들은 지금도 항상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이야기 한다. 그들은 아버지와의 좋은 인연을 나에 대한 애정으로 표현한다. 어젠 누굴 만났노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어머님은 아버지의 친구가 전부 막내아들의 친구가 되었다며 재미있어 하신다. 남에게 많이 베풀면 그 자식에게 돌아간다는 옛말을 매일 느끼며 살아가는 나에겐 아버지에 대한 그 진한 그리움이, 그리고 감사함이 시